항목 ID | GC01300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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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麗水船所遺蹟 |
영어의미역 | Remains of Shipbuilding Site in Yeosu |
이칭/별칭 | 순천부 선소,시전동 선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시전동 708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병호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5년 4월 20일 - 여수 선소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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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여수 선소유적 사적 재지정 |
성격 | 수군시설 |
면적 | 18,541㎡ |
소재지 주소 | 전라남도 여수시 시전동 708 |
소유자 | 국유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시전동에 있는 조선시대 수군 전선의 정박처 및 수군의 일차적인 제반 업무를 수행하는 항만시설을 포함한 일정한 군사적 공간.
[건립경위]
여수 선소유적이 위치하던 곳의 포구는 예로부터 장생포라고 하였다. 장생포는 고려 공민왕 초 왜구가 장생포로 침입해 왔을 때 유탁이라는 장수가 위엄을 갖춘 모습으로 적을 물리쳤다. 이것 때문에 병사와 주민들이 그의 공덕을 기리며 부른 노래가 ‘장생포곡’이라고 『고려사』에 실려 있다.
그 장생포곡이 바로 고려 악학궤범에 실린 ‘동동’이라는 노래로 고려 가요 ‘동동’의 탄생지가 이곳이라는 설이 있다.
이렇게 장생포는 당시로서는 여수반도의 최대 포구였기 때문에 왜구들이 욕심내던 최고의 요지였다.
이곳 선소 앞바다는 여수가 감싸 안고 있는 가막만으로 선소는 장도와 가덕도가 앞을 막아 적들로부터 은폐와 파도를 막아 수군 전선들의 대피소로 적소였다.
장생포 일대는 선박을 수리하고 건조하는 일이 필수적이었고 최적의 입지적 조건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곳이다.
난중일기(1592년)에 의하면 순천부 선소는 임진왜란 전에 생겨 임진왜란 중 전라좌수영 관할 순천부의 수군기지로 사용되었음이 확실하나 만들어진 연대는 확인할 수 없다.
[현황]
『여지도서(輿地圖書, 1760)』에 “與地圖書 長生浦 在雰六十里 本府戰船所泊”라는 기록이 있다. 같은 책 순천부 지도의 현재 선소 자리에 ‘船所’라는 표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순천부 선소는 장생포에 있고 장생포는 선소가 있는 포구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규장각에 소장된 『순천부고적(順天府古跡)』 고지도에는 현 위치에 ‘船所’라고 표기하고 「自邑東路六十里」라는 노정을 기록하고 있으며 장성마을도 나타나 있다.
또 이 지도에 나타난 선소 시설로는 선소창(船所倉), 수군기(水軍器)가 있을 뿐 구전되어 온 세검정(洗劍亭)은 보이지 않고 바다에 전선 2척이 그려져 있다.
유적으로는 배를 정박시키거나 피항시키고 긴급히 출항하기 위한 인공 구조물인 일반적으로 굴강(掘江)이라 부르는 굴항(掘港)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풀뭇간이 복원되어 있고, 세검정이 있다. 바닷가에는 배를 매어두는 곳이라고 하는 계선주가 서 있다. 계선주는 지형상 툭 튀어 나온 곳에 세워져 있는데 통상 배는 홈으로 들어간 곳에 대피시키는 것으로 보아 계선주라기보다는 보초병의 역할을 하는 석인이 아니었나 판단된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 3척 중 순천부귀선을 여기에서 건조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여러 관찬자료에서 당시 선박기술자들의 배치 규모 등을 감안할 때 여수 선소유적에서 거북선을 건조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설립 당시엔 “순천부선소”라고 불렀으나 문화재법 정비로 여천시 지역에 포함되어 “여천선소”라고 불렸다. 여수시가 여천시와 통합되면서 지금은 “여수선소유적”으로 부른다. 현재는 여수선소유적 문화재정비계획에 의거 주변의 마을을 철거하고 부지를 조성하여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1995년 4월 20일 사적 제39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