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7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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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旅軒先生豫言-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은정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8년 - 「여헌 선생의 예언」 『의성 군지』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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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비 | 청덕선정비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 808 |
성격 | 전설|인물 전설 |
주요 등장 인물 | 여헌 장현광 |
모티프 유형 | 명관|지혜|판결 |
[정의]
경상북도 의성에서 현령을 지낸 여헌 장현광의 선정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
[개설]
의성 현령을 지낸 여헌 장현광의 학덕과 선정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인물 전설이다.
[채록/수집 상황]
1998년 의성 군지 편찬 위원회에서 발행한 『의성 군지』에 「여헌 선생의 예언」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내용]
조선 후기 학자이자 관리였던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은 학문과 도덕이 매우 뛰어나 영남학파의 후계들이 자주 문묘(文廟) 배향(配享)을 상소할 정도였다. 여헌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의성 현령이었는데, 지역의 다양한 일화들은 여헌 선생의 인품과 지혜를 알기에 충분한 것들이다.
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얼마 전이었다. 마을 백성 중에서 돈을 빌려준 사람과 빌린 사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소송이 제기되었다. 의성 현령 여헌은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처결하였다.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 사람에게 “세상에 바른 마음을 가지고도 옳게 살기가 어렵거늘 너는 어찌하여서 남의 돈을 쓰고도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단 말이냐? 어서 갚도록 하여라.” 하고 크게 꾸짖었다. 돈을 빌려준 사람은 현령의 판결을 듣고 만면에 희색이 가득하였다. 그런데 여헌 선생은 그를 향해 “남에게 돈을 빌려 줄 때에는 반드시 되돌려 받아야 하겠으나,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형편도 허다히 있다. 이번 소송 때문에 너희 둘 사이의 좋던 인정이 변질되었으니 딱한 노릇이다.”라며 “그 돈을 돌려받아 보았자 너에게는 별 쓸모도 없겠으니 그 일을 어찌 하겠나?”라며 뜻 모를 말을 하였다. 판결을 듣고 있던 사람 중에 현령의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일본의 침략으로 강산은 초토화되고 인명은 무차별적으로 유린되었다. 전란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니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산중으로 피난을 갔고, 목전의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이 되니 엽전 꾸러미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여헌이 판결 때 했던 말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돈이 재물로서의 가치를 잃을 것이라는 여헌의 명담은 크게 적중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임진왜란을 예측한 선견지명까지 인구에 회자되었다.
한편 여헌 선생이 세상을 놀라게 한 또 한 가지 예언은 5월 비상(飛霜)을 미리 짐작한 것이다. 때는 5월이었지만 서리가 내릴 것을 미리 알고 남원의 들에 공동 못자리를 만들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는 못자리 옆에 크게 불을 피우게 하고 술과 고기를 하사하여 사람들이 밤을 새며 즐겁게 놀게 하였다. 이윽고 아침이 되고 보니 천지는 때 아닌 서리로 뒤덮였는데 못자리만은 파랗고 생생하여 무사했다고 한다. 그 후 여헌 선생은 의성을 떠났으나 높은 학덕과 현령으로 재임할 때의 업적을 인정받아서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가 세워졌으며, 의성 향교 경내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모티프 분석]
「여헌 선생의 예언」의 주요 모티프는 ‘명관’, ‘지혜’, ‘판결’이다. 명관에 대한 전설에서 그의 선정을 드러내는 지표로 많이 사용되는 것이 지혜로운 판결이다. 여헌 선생은 백성들 간의 소송을 지혜롭게 처결하고, 나아가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까지 지닌 인물이다. 의성 향교에 선정비가 세워져 지금까지도 의성 군민들의 마음 속에 명관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