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7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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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城山- |
이칭/별칭 | 금성산의 무덤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
집필자 | 박유미 |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에 있는 금성산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금성산 무덤 이야기」는 금성산에 무덤을 써 부자가 된 사람과 그 무덤으로 인해 마을에 지독한 가뭄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로 명산에 관한 전설이다.
[채록/수집 상황]
1993년 8월 18일에 의성군 금성면에 거주하는 임광식[남, 당시 53세]에게서 채록한 내용으로, 1993년에 임석재가 저술한 『한국 구전 설화』-임석재 전집 12 경상북도 편에 「금성산 무덤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내용]
의성군 금성면 탑리리는 삼한 시대의 고대 국가인 조문국[召文國]의 고도(古都)로 많은 고적(古蹟)이 산재해 있다고 하며, 고려 말 문익점 선생이 목화를 처음 경작(耕作)한 곳으로도 유서 깊은 곳이다. 탑리리의 금성산은 전설로도 유명하다. 금성산은 남으로는 금성면 산운리를 감싸 안고 서쪽으로는 탑리리를 끼고 우뚝 솟아 있어 그 모양이 마치 가마 모양이어서 일명 ‘가마산’이라고도 한다. 자동차를 타고 중앙 고속 도로를 지나면 차창 밖으로 잘 볼 수 있다. 금성산에는 옛날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만약에 금성산에 묘를 쓴다면 산을 둘러싼 금성면에는 석 달 동안 비 한 방울 안 내리는 가뭄이 들지만 묘를 쓴 사람은 갑자기 운수가 대통하여 큰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고종 때 이 지방에 심한 가뭄이 든 적이 있었다. 나라 전체에 비가 왔는데도 유독 금성면만은 비가 오지 않았던 것이다. 논밭은 말라 곡식은 타들어 갔고, 농민들은 탄식하면서 비를 기다리다 지쳐갔다. 결국 더 이상 비가 오기만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한 농민들은 “금성산을 다 파헤치라”고 외쳤다. 그리하여 인근 동민 수백 명이 산 정상에 모였다.
금성산은 밖에서 보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으나 산상은 넓이가 600평이나 되는 모래사장이었다. 동민들은 사금을 캐듯이 사방을 샅샅이 뒤졌고, 드디어 땅속 10m 아래에서 조그마한 석곽을 발견하였다. 동민들의 울분은 일시에 폭발하여 해골과 함께 석곽을 산 아래로 팽개쳤다. 그러자 갑자기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모여 들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편, 금성산에 무덤을 쓴 사람은 대도시에 가서 운수가 대통하여 무더기로 돈을 벌어 큰 부자가 되었으며, 고향에 논밭과 과수원을 사서 잘 살게 되었다. 그는 금성산의 음덕에 보답하기 위해 학교가 없는 금성면에 중학교를 세우는 등 큰 사업을 했다. 지금도 가뭄이 들면 금성산에서 기우제를 지내거나 산을 파면 비가 온다고 한다. 그래서 금성산을 명산이라고 일컫는다.
[모티프 분석]
「금성산 무덤 이야기」의 주요 모티프는 ‘명당’이다. 예로부터 명당에 얽힌 이야기는 많이 전해진다. 여기서는 탑리리의 명당인 금성산에 무덤을 써서 부자가 된 사람이 산의 음덕에 보답하기 위해 학교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런데 금성산에 무덤을 쓰면 안 된다는 금기를 어기고 부자가 되었으나 비극적 결말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비극적 결말’을 ‘보답’이라는 선행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이야기들과는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