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766 |
---|---|
한자 | -大谷寺花煎-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
집필자 | 박은정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79년 - 「대곡사 화전놀이」 『문소의 얼』에 「대곡사의 화전놀이[민속놀이]」라는 제목으로 수록 |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82년 - 「대곡사 화전놀이」 『의성의 전설』에 「대곡사의 화전놀이」라는 제목으로 수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8년 - 「대곡사 화전놀이」 『의성 군지』에 수록 |
성격 | 전설|민속놀이 유래 전설 |
모티프 유형 | 화전놀이 |지역민의 화합 |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대곡사의 화전놀이와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
[개설]
「대곡사의 화전놀이」는 비봉산 대곡사 인근에서 벌어졌던 화전놀이의 실상과 함께, 화전놀이가 일제 강점기 때 의성군민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는지도 전해주는 전설이다.
[채록/수집 상황]
1979년 의성군 교육청에서 발행한 『문소의 얼』에 「대곡사의 화전놀이[민속놀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으며, 자료 제공자는 ‘신산 초등학교안병규’라고 기록되어 있다. 1982년 의성군에서 발행한 『의성의 전설』에도 같은 제목으로, 1998년 의성 군지 편찬 위원회에서 발행한 『의성 군지』에는 「대곡사 화전놀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의성 문화 관광’ 홈페이지에도 소개되어 있다.
[내용]
옛날 우리 여인네들은 바깥출입이 그다지 자유롭지 않았다. 그래서 산과 들에 갖가지 꽃이 피고 나비가 날며, 강남 갔던 제비가 다시 옛 집으로 날아드는 봄날이 되면 바깥나들이를 하는 풍속이 있었다. 꽃을 얹은 부침개를 해 먹는다 하여 화전(花煎)놀이라 불렀고, 그날은 대개 삼월 삼짇날이었다. 의성 지역 사람들은 비봉산을 찾아 화전놀이를 벌였다. 비봉산은 높이가 약 580m가량이고 산 동쪽 기슭에 대곡사(大谷寺)가 있다. 이 대곡사를 둘러싼 산자락에 자생하는 진달래가 지천이어서 봄에는 온 산을 붉게 물들였다. 대곡사는 화전놀이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모임은 특별히 주선하는 사람도 없고, 또 어느 기관에서 주관하는 것도 아니었다. 비봉산을 중심으로 인근 마을의 주민들이 스스로 모여 삼짇날 놀이를 하였고, 이 풍속은 1970년도 초반까지 이어져 왔다.
비봉산은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북단 낙동강 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삼짇날 화전놀이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의성군의 다인면·신평면·안계면·단북면·비안면 일부와 예천군의 지보면·풍양면, 안동시의 풍천면 일부, 상주시 중동면·낙동면, 구미시 일부 등 5개 시·군 13개 면민이 운집하여 그야말로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특히 8·15 해방 전후로는 무려 수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고도 한다. 더욱이 일제 강점기 말엽은 청년과 장년들이 징병, 징용, 보국대 등에 강제 징발되던 때이므로 그 울분을 달래기 위해 유독 많은 인파가 붐볐다. 따라서 치안과 질서 유지를 구실로 의성 경찰서, 예천 경찰서에서는 기동 경찰을 동원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1933년에는 비봉산 금광(金鑛)에서 일하는 일본인이 이 화전놀이에 왔다가 놀이 군중에 맞아서 죽은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그 당시 일본에 대한 우리 민족의 울분이 어떠했던가를 말해주는 일례가 되기도 한다.
화전놀이 는 당일 하루만 진행되는 행사였다. 그러니 일시에 몰려든 인파가 비봉산 꼭대기에서부터 대곡사 경내에 이르기까지 가득했는데, 그야말로 자연의 꽃과 사람의 꽃이 어우러져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여인네들은 산에 만발한 진달래꽃을 꺾어 머리나 옷에 꽂아 멋을 부리기도 하고 꽃 방망이를 만들어 놀기도 했다. 특정인이나 기관에서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제각기 놀았으며, 젊은 아낙네들에게는 시집을 간 후 한동안 못 보던 친구들과의 즐거운 상봉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재화 재화 재화화/ 얼씨구 절씨구 좋을시고/ 춘삼월 화전놀이를 간다/ 어라 두둥실 거들거리고 나간다.”라는 화전노래에 흥을 싣고 노래와 춤으로 하루를 보낸다. 무엇보다 낭만을 즐길 수 있는 것은 화전이다. 화전은 산에 만발한 진달래 꽃잎을 따서 쌀가루에 반죽하고 참기름을 발라 지져 먹는 두견화전(杜鵑花煎)으로 봄의 미각을 살리는 데 으뜸가는 시식(時食)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복숭아꽃, 살구꽃과 햇파, 미나리 등도 전으로 부쳐 먹었다.
엄동설한 추위에 갇혀만 지내다가 삼짇날이 되면 추위와 울적한 기분을 다 날려버리고 봄 향기 가득한 화전을 먹으며 기운을 돋우었다. 이 화전놀이는 새해 농사의 출발을 알리는 행사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비록 모이는 사람도 전혀 없고 진달래도 울창한 솔숲으로 인해 거의 볼 수가 없지만 퇴락하던 대곡사가 새롭게 보수되면서 화전놀이의 감회도 다시금 되살아난다.
한편 문헌에 의하면, 조선 시대에 화전놀이로 유명한 곳은 남산(南山)의 잠두대와 북악(北岳)의 필운대(弼雲臺), 그리고 세심대(洗心臺) 등이었다. 이들 근처에는 진달래를 비롯한 여러 가지 봄꽃이 만발하여 화전놀이가 성행하였다고 한다. 그 후 개항기에는 창의문(彰義門) 밖 탕춘대, 이태원(梨泰院) 등에 봄꽃이 많이 피어 그곳 역시 화전놀이가 성행하였다고 전한다.
[모티프 분석]
「대곡사 화전놀이」의 주요 모티프는 ‘화전놀이’와 ‘지역 주민의 화합’이다. 대곡사 인근에서 벌어졌던 화전놀이는 의성군 인근 주민들의 화합에 큰 역할을 했다. 특히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여성들에게 이날의 화전놀이는 즐거운 외출이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울분을 표출하는 매개가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