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7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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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氏烈女碑-義犬-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장대리 분명 마을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은정 |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장대리 분명 마을에 나란히 세워진 비석에 대한 이야기.
[개설]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딸과 함께 순절한 열녀 박씨의 정절을 기리는 인물 전설이다. 더불어 그 주인에게 충성을 다한 의견(義犬)도 함께 칭송되고 있다.
[채록/수집 상황]
1982년 의성군에서 발행한 『의성의 전설』에 「박씨 열녀비와 의견」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1998년 의성 군지 편찬 위원회에서 발행한 『의성 군지』에도 같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의성 문화 관광’ 홈페이지에도 소개되어 있다.
[내용]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장대리 분명 마을 서쪽 산기슭에는 크고 작은 두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이 비석은 열녀 박씨(朴氏)와 의견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비석에는 각각 ‘열부 정태을 처 박씨 지려(烈婦鄭太乙妻朴氏之閭)’와 ‘정가구(鄭家狗)’라고 새겨져 있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으면서 서 있지만 오가는 길손들의 칭송이 있는 한 그리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비석이 세워진 사연은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서운 기세로 조선에 쳐들어온 왜군이 의성까지 이르렀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피난을 갔다. 그런데 정태을(鄭太乙)의 처 박씨와 그의 두 딸은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하였고, 안타깝게도 쳐들어온 왜군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왜군들은 이 가련한 여인들에게 짐승처럼 덤벼들었다. 정절을 목숨을 지키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겼던 조선 시대 여인들은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자주 자결을 선택하였다. 박씨의 선택 또한 다르지 않았다. 시퍼런 칼로 두 딸과 함께 처절하게 자결한 것이다. 그러자 덤벼들던 왜군들도 혼비백산하여 물러가 버렸다. 이렇게 왜군들은 물러갔으나 마을은 텅 비어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심한 까마귀 떼만 날아들어 시체를 쪼려 하였다. 이때 까마귀를 쫓고 시체를 지킨 것은 다름 아닌 박씨가 기르던 개였다. 주인의 죽음을 지켜본 개가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주인의 시체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주인 잃은 충견도 굶주림에 지쳐 그만 주인 옆에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전란이 끝난 후 열녀 박씨에게는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소주삼강록(韶州三綱錄)』에 올랐다. 또한 사람들은 주인의 시체를 지키던 박씨의 개를 의구(義狗)로 칭송하며 두 개의 비석을 나란히 세웠다고 한다. 인근에 함양 박씨들이 많이 살고 있어 열녀 박씨의 관향이 함양일 것이라는 추측도 함께 전한다.
[모티프 분석]
「박씨 열녀비와 의견」의 주요 모티프는 ‘열녀’와 ‘의견’이다. 정절을 잃지 않기 위해 두 딸과 함께 순절한 열녀 박씨와, 주인의 주검을 지킨 충견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지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전설이다. 박씨와 같은 죽음은 잦은 전란 당시 우리네 여인들의 안타까운 선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의견과 관련된 전설은 전국에 널리 퍼져 있는 광포 전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