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7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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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樊巖政丞-時節-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은정 |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에 전해오는 비안 현감을 지낸 채응일(蔡膺一)과 아들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의 어린 시절 일화에 대한 이야기.
[개설]
명재상으로 이름난 번암 채제공[1720~1799]의 어린 시절 일화를 통해 그의 인품과 기개를 보여주는 인물 전설이다. 붕당이 격심했던 시기에 화해와 상생의 정치를 폈던 채제공의 행보를 미리 짐작해 볼 수 있게 하는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1998년 의성 군지 편찬 위원회에서 발행한 『의성 군지』에 「번암 정승의 어린 시절」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의성 문화 관광’ 홈페이지에도 같은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다.
[내용]
번암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정조의 탕평책 추진을 도왔던 채제공이다. 그는 정조 때에 영의정과 우의정 없이 수년간 독상(獨相)을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아버지는 채응일인데, 조선 후기 영조 때 비안 현감으로 재임한 적이 있었다. 비안현에서 선정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 널리 명성을 떨쳤다. 그래서 그 이후에 재임했던 이귀응(李龜應) 현감과 함께 위천가의 절경으로 알려진 곳인 비안면 용남리의 부흥대에 송덕벽각(頌德壁刻)이 나란히 새겨져 오늘까지 전해 오고 있다.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에는 번암의 어린 시절 일화가 전설로 전하고 있다. 번암의 아버지 채응일이 비안 현감으로 재임할 때 번암도 비안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는 붕당이 극심하였고 특히 남인(南人)과 노론(老論)의 갈등이 심각하였다. 채응일은 남인 계열이었는데, 노론 계열이던 경상도 암행어사가 채응일을 비안 현감에서 파직시킬 작정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어사는 역졸들을 이끌고 관아와 객사를 기습하였다. 여느 날처럼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사태가 벌어지자 놀란 채응일은 엉겁결에 뒷산인 모란봉의 숲속으로 피신하였다. 현감을 놓쳐 분개하고 있는 어사에게 역졸이 와서 놀라운 사실을 고하였다. 채응일의 어린 아들이 창망한 가운데에도 늠름하고 의젓하게 밥을 먹으면서 자신들을 꾸짖었다는 것이다.
영특한 자손이 나는 것은 그 집안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자랑이었지만, 반대 세력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불의를 저지르는 무리일수록 뒷날 시대가 바뀌면 무슨 보복이 돌아오지 않을까 염려가 됐기 때문이었다. 역졸의 보고를 들은 어사는 곧바로 어린 소년을 만나 보았다. 들은 바대로 소년의 기상은 서릿발 같았고,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어사는 역졸들을 데리고 철수하였고, 사태가 이렇게 수습되자 평온을 되찾은 후 채응일은 모란봉에서 돌아왔다. 한편 동헌(東軒)에서 기다리던 어사는 돌아온 현감을 버선발로 뛰어 내려가 맞이하며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며 백배사죄하였다. 둘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고 흥겨운 주석이 벌어졌다. 취중의 어사는 “어찌하면 그렇게 영특한 아들을 둘 수 있습니까?”라고 하며 경의를 표하였다. 그러면서 남인과 노론 사이의 붕당이 아무리 심각하여도 두 사람 간의 인정은 결코 변치 말자는 다짐과 함께 사과를 전하였다.
이윽고 52년 동안 왕으로 재위하였던 영조의 시대가 지나고 정조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노론 세력은 급격하게 무너졌고, 남인이 득세하였다. 당시 정조는 노론 세력의 핍박으로 뒤주 속에 갇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 세자의 보복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원로 공신이었던 채제공은 임금의 곁에서 직언을 서슴지 않으며 포용의 왕도정치를 강조하였다. 채제공의 노력 덕분에 노론에 대한 남인의 정치적 보복은 최소화될 수 있었다. 채제공이 붕당의 격화를 막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번암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비안 고을에 와서 큰 사건을 겪었다. 그 일은 두고두고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게 했을 것이다. 보복은 끊임없는 악순환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깨닫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경험들은 그가 사려 깊고 위대한 정치인이 되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며,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손에 꼽히는 명재상(名宰相)이라는 이름을 얻는 데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편, 이 전설은 신빙성에서는 다소 문제가 있다. 번암의 출생 연대와 아버지 채응일의 비안 현감 재임 시기를 견주어 보면, 번암이 비안현에 있었던 때는 이미 소년기를 벗어났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모티프 분석]
「번암 정승의 어린 시절」의 주요 모티프는 ‘어린 번암의 기개’이다. 인물 전설에서는 그 인물의 성품을 보여주기 위해 특정 사건을 제시하게 된다. 붕당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것을 굳게 믿고 시행하는 번암 정승의 모습이 어린 시절의 이 일화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