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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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河洛 |
이칭/별칭 | 계삼(季三),해운당(海雲堂),김길주(金吉周)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교촌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명구 |
[정의]
개항기 의성 출신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의성. 자는 계삼(季三). 호는 해운당(海雲堂). 본명은 김길주(金吉周)이다. 아버지 김운휘(金運輝)와 어머니 덕수 이씨(德水李氏) 사이에서 4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김하락(金河洛)[1856~1896]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교촌리 출신으로, 어릴 때 황학산에서 공부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수학했는지 그 학통이 불분명하다.
1895년 을미의병이 거병했을 때, 김하락은 경기도 이천에서 이천 의진을 이끌고 있었다. 의성의 김상종 의진은 1896년 3월 창의하여 4월에 의성읍 구봉산에서 첫 전투를 치렀으나 관군에 패하였다. 이에 김하락은 의성 의진에 가담하였다.
김하락은 1895년 11월 15일 단발령 직후 봉기하여 1896년 7월 순국할 때까지 전기 의병 전쟁에서 활약하였으며, 의병 전쟁 전개 과정을 기록한 『김하락 진중일기(金河洛陣中日記)』를 남겼다. 김하락은 1895년 11월 15일에 단발령이 내려지자 거사할 계획으로, 이종제(姨從弟)인 조성학(趙成學)·동지 구연영(具然英)·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과 더불어 이튿날 새벽에 몰래 한강을 건넜다. 17일 이천군에 들러 화포군 도영장(火砲軍 都領將) 방춘식(方春植)을 불러들여 포군 명부를 가져다 놓고 포군 일백여 명을 징발하여 여러 대로 나누어 우선 의병을 모집하는 임무로 맡게 하였다. 이에 민승천을 이천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김하락은 각 군 도지휘(各軍都指揮)가 되어 안옥희(安玉熙)와 안재흥(安載興)을 종사(從事)로 삼았다.
김하락 의진은 의성 의병이 황산 전투에서 대패했다는 보고를 접하고, 의성 의병장 김상종(金象種)을 찾아 연합하기로 하여 이천·의성·청송 연합 의진이 결성되었다. 연합 의진은 1896년 5월 14일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감은리에서 감은리 전투[성황현 전투라고도 함]를 치러 승리를 이끌었고, 이어 5월 25일 비봉산 전투를 치렀으나 패배하기에 이르러 김상종은 의성 의진의 해산을 명하였고, 김하락 의진은 경주로 이동하였다.
김하락 의진이 경주에 도착하자 경주 지역의 유림 김병문·이시민·서두표 등이 찾아와 연합 의진의 결성을 제안하여 이천·경주 연합 의진이 결성되었다. 여기서 경주성 전투를 치렀으나 패퇴하여 김하락은 부대를 이끌고 영덕을 거쳐 영해로 갔다. 이때 적병 삼백여 명이 영덕으로 돌진해 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유시연에게 영덕으로 가서 적을 토벌하고 함께 안동부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당시 24세에 불과했던 유시연이 주저하므로 물리치고 조성학과 더불어 진격하기로 하였다. 영덕 전투에서 무수히 적을 무찔렀으나 운명의 6월 4일 폭우가 퍼부었고 적병 수백 명이 수륙으로 밀려온다는 말을 듣자 의병진은 그대로 흩어졌다. 김하락을 따르는 자는 불과 수십 명에 불과했다. 포탄을 무릅쓰고 좌충우돌하다가 총탄에 맞았다. 김하락은 운명 직전 시신을 적에게 보일 수 없다 하고 강물에 투신하여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2년에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