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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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深根 |
이칭/별칭 | 여후(汝垕)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서제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576년 - 이심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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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21년 - 이심근 무과에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637년 - 이심근 사망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서제리 |
묘소 |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성산(星山) |
대표 경력 | 훈련원 봉사 |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여후(汝垕). 좌찬성(左贊成) 이항(李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수종(李守種), 아버지는 참봉(參奉) 이청(李淸), 어머니는 주석수(朱碩守)의 딸 상산 주씨(商山 朱氏)이다.
[활동 사항]
이심근(李深根)[1576~1637]의 선대는 한양과 인근에 거주하였는데, 증조할아버지 이항이 정적으로부터 무고를 당하자 할아버지 이수종이 관직에 뜻을 버리고 향촌에 은거한 시점부터 낙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1621년(광해군 13)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이후 훈련원 봉사(訓鍊院 奉事)를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비분을 이기지 못하고, “나라에 위태로움이 이러한데, 신하된 자는 죽음으로 보답할 뿐이다.” 라고 말하며, 향병(鄕兵)을 모아 의병장으로 참전하였다. 의병들은 남한산성 아래까지 당도하였으나, 1637년 1월 3일 송파(松坡)[서울특별시 송파구]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묘소]
병자호란 때 송파 전투에서 순절 이후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 이에 아들 이기식(李基式)이 의관장을 치렀다고 한다. 묘는 현재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