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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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孫興忠 |
이칭/별칭 | 복(福)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옥연 2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용만 |
묘소 | 백학산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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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의사(義士) |
성별 | 남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도 비안 출신의 의사(義士).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복(福). 손경원(孫敬源)의 8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회령 판관(會寧 判官)을 지낸 손근(孫瑾)이고, 할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손의형(孫義亨)이고, 아버지는 충의위(忠義衛) 손전(孫荃)이고, 어머니는 우성윤(禹成允)의 딸 숙부인(淑夫人) 단양 우씨(丹陽 禹氏)이고, 처는 밀양 박씨(密陽 朴氏)이다.
[활동 사항]
손흥충(孫興忠)[?~?]은 선대는 경상도 순흥(順興)에 거주하였으며, 조부 대에 예안(禮安)으로 이거하였으나, 이후 어느 시점에 비안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그의 후손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옥연리 일대에 거주하고 있다. 손흥충은 임진왜란 때의 활약으로 비안현(比安縣)의 의사(義士)로 칭송받았다. 임진왜란으로 고을의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갈 때, 손흥충은 가사를 돌보지 않고 비안 향교(比安 鄕校)에 모셔져 있는 공자(孔子)를 비롯한 오성(五聖)의 위판을 현의 남쪽 10여리에 있는 성재암(聖在巖) 동굴 속에 숨겼다. 손흥충은 위판을 숨기는데 그치지 않고 전란으로 물자가 부족한 와중에도 향례(享禮)를 지속하였다. 전란으로 비록 비안 향교는 소실되었으나, 위패는 무사히 보존되었고 향례도 끊이지 않았기에, 고을 사람들은 손흥충을 의사로 칭송하게 되었다.
[묘소]
묘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백학산(白鶴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손흥충의 행적을 기려 손흥충 사후 비안 향중(鄕中)이 주도하여, 현재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소재 비안 향교 앞에 표의각(表義閣)을 세웠다. 표의각은 오랜 세월 동안 풍우에 퇴락되었지만, 1983년 봄 후손들의 뜻을 모아 의성군 비안면 옥연 2리로 이건하여 보수해 놓았다. 표의각의 비문은 김재경(金在敬)이 썼으며, 이상학(李象學)이 기문(記文)을 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