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9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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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時敎 |
이칭/별칭 | 선경(善卿),둔재(遯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하창환 |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선경(善卿). 호는 둔재(遯齋).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 예조 정랑, 병조 정랑을 지낸 복암(幞巖) 정경우(鄭景祐)의 5세손이다. 영일 정씨가 비안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은 바로 정경우부터이다.
[활동 사항]
정시교(鄭時敎)[1669~1754]는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러웠다. 나이 겨우 7살에 아버지의 병을 간호하는데 혼자 힘으로 이겨내었다. 언젠가 의원에게 약을 구하러 갔다가 돌아오는데 갑자기 내린 비 때문에 물이 불어 내를 건너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그때 한 노인이 그 연유를 묻고는 기특하다며 업어서 내를 건너 주고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사람들은 그 노인이 그의 효심에 감복한 신령이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오래 누워 있었으나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보살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자 가난한 집안 사정에도 불구하고 장례의 모든 절차에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정성은 어머니의 경우에는 더욱 더했다. 팔순이 넘도록 고기반찬이 없는 밥을 먹고, 더우나 추우나 가리지 않고 성묘를 다녔다.
임종을 당해서는 몸을 깨끗이 씻고 가묘(家廟)를 배알하고, 집안사람과 일가친척들을 모두 불러 조용히 당부의 말을 남기고 앉은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1744년(영조 20)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가, 나중에는 다시 가의대부 용양위 부호군(嘉義大夫 龍驤衛 副護軍)에 이르렀다. 그리고 윤봉오(尹鳳五)가 지은 묘갈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