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964
한자 申福成
이칭/별칭 천경(千敬),호은(湖隱)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하창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8년연표보기 - 신복성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28년연표보기 - 신복성 사망
출생지 신복성 출생지 -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용곡 1리지도보기
성격 효자
성별
본관 고령(高靈)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이 고령(高靈). 교리(校理)를 지낸 신호(申濩)의 손자이다.

[활동 사항]

신복성(申福成)[1568~1628]은 서울에 거주하다 도호(道湖) 마을, 현재 의성군 단밀면 용곡 1리로 옮겨와 살았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어질었으며, 자라서는 그 마음이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그리고 형제들과의 우애 또한 두터웠다.

1615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단북(丹北)의 월봉산(月峰山) 아래에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시묘를 하는 중에 단 한 번도 집을 찾지 않았다. 그리고 시묘하는 3년 동안 흘린 피눈물로 상석(床石)이 붉게 물들었다.

시묘를 마친 뒤에는 아버지의 묘소가 건너다보이는 위천(渭川) 언덕에 도호정(道湖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아침저녁으로 묘소를 향해 예를 올렸다.

[상훈과 추모]

당시 도호 마을이 속했던 상주(尙州)의 수령이 그의 행적을 전해 듣고 대단한 효자라고 칭송을 하며 『상주읍지(尙州邑誌)』에 기록하도록 했다. 그리고 당시의 명망 높은 선비인 유수암(柳修巖), 조초은(趙樵隱), 손허재(孫虛齋), 김동리(金東離) 등이 시묘 살이하는 험한 곳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격려하며 그의 효행을 칭송하는 글을 지었다. 1968년 후손들이 그의 신도비(神道碑)를 세우고, 비문은 문소(聞韶) 김정모(金正模)가 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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