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9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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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濟均 |
이칭/별칭 | 우여(禹如),봉와(鳳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하창환 |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이 안동(安東). 자는 우여(禹如). 호는 봉와(鳳窩). 아버지는 김병덕(金炳德)이고 어머니는 김해 김씨(金海 金氏)이다.
[활동 사항]
김제균(金濟均)[1796~1849]은 15살 때 아버지 김병덕(金炳德)이 세상을 떠났다. 슬퍼하는 마음이 지나쳐 몸이 상할 정도였다. 장삿날에는 아버지를 묻고 나서 그 곁을 떠나려하지 않았다. 온갖 방법으로 달랬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에 그의 작은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 “홀로 남은 어머니를 버리는 것은 더할 수 없는 불효요, 무서운 산골에서 산짐승에게 버리는 것은 어버이의 뜻을 저버리는 가장 큰 불효가 아니냐.” 하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그에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데리고 집으로 왔다.
그로부터 몇 해 후 홀로 남은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 金氏)가 병이 들었다. 백방으로 약을 구해 간병을 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양친을 모두 잃었다는 슬픔에 몸을 가누지 못하다가 시묘를 하며 날마다 곡을 하였다.
어느 날 밤에 마을 사람들이 깊은 산중에서 외롭게 생활하는 그를 위로하고자 찾아갔다. 그런데 큰 호랑이가 묘막 앞에 가로누워 있어 감히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이튿날 다시 찾아간 마을 사람들은 지난밤의 일을 그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그는 어두운 밤이라서 바위를 잘못 본 것이 아니겠냐며 오히려 사람들의 말문을 막았다. 이로써 사람들은 그의 성품과 행실에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상훈과 추모]
김제균의 효행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유림에서는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확인하고는 1940년 4월 포상과 함께 효자각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