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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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英凱 |
이칭/별칭 | 경모당(敬慕堂),일보(日輔)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 실업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599년 - 조영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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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41년 - 조영개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으로 이주 |
몰년 시기/일시 | 1664년 - 조영개 사망 |
출생지 | 조영개 출생지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덕성리 |
거주|이주지 | 조영개 이주지 -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 실업 2리 |
수학|강학지 | 조영개 수학지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덕성리 |
수학|강학지 | 조영개 수학지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
묘소|단소 | 조영개 묘소 -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 황학산[박달령]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함안(咸安) |
대표 관직|경력 | 사헌부 집의 |
[정의]
조선 후기 의성으로 이주해 온 함안 조씨(咸安 趙氏)의 입향조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일보(日輔), 호는 경모당(敬慕堂). 생육신인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6세손이다. 할아버지는 대포 만호(大浦 萬戶)를 지냈으며, 병조 참판에 증직된 검암(劒巖) 조우(趙堣)이고, 아버지는 임진왜란 당시 영천(永川) 수복 전투에서 군공을 세워 훈련원 봉사 겸 별시위에 제수되었는데, 후에 가선대부에 승차하고 선무 원종공신에 녹훈된 송포(松浦) 조종악(趙宗岳)이고, 어머니는 통덕랑 김손(金遜)의 딸인 정부인(貞夫人) 경주 김씨(慶州 金氏)이고, 부인은 김흥제(金興濟)의 딸인 숙인(淑人) 의성 김씨(義城 金氏)이다.
[활동 사항]
조영개(趙英凱)[1599~1664]는 1599년 4월 29일 경상도 청송부 안덕현 덕성리에서 태어난 조영개는 어린 시절 동계(東溪) 조형도(趙亨道)에게 경사를 배우고 일찍이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이후 성리학에 깊이 빠져 정주학의 여러 책들을 섭렵하였다. 성실히 학문에 정진하여 학행이 후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부모를 섬김에 극진하여 예(禮)를 다하여 모셨으며, 형제간에는 화목에게 지내고 친구와는 공경으로 사귀었다. 1631년 모친상을 당하자 3년간 여막(廬幕)에서 지냈으며, 1634년 아버지가 위급하자 하늘에 기도하여 병을 낳게 하였다. 1641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너무 슬퍼하여 병을 얻게 되었다. 같은 해 흉년에 자기 집 곳간의 식량을 모두 내어 굶주리는 사람들을 살려 사람들이 그의 덕행을 칭송하였다.
이때에 전쟁과 기근으로 인심이 투박해지자 가족을 이끌고 은둔하여 자연을 즐기며 살고자 소주(韶州)[의성]의 옥산(玉山) 제동(堤洞)으로 옮겨갔다. 의성으로 이주한 후 몇 칸의 정사(精舍)를 짓고 ‘경모재(敬慕齋)’라 하였다. 이때에 「자경십육조(自警十六條)」의 잠(箴)을 지어 스스로 몸을 닦고 학문에 힘쓰니 사우(師友)들이 경외하고 추종했다. 만년에 나재(懶齋) 신열도(申悅道)의 문하에 들어가 다른 문하생들과 더불어 학문을 닦고 심법의 요결을 들었다. 조영개의 뛰어난 학문을 듣고 먼 곳에서도 학생들이 찾아와서 강학을 하던 중 학행으로 천거되어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다.
[학문과 저술]
어린 시절 백부인 동계 조형도에게 경사를 배후고 나재 신열도의 문하에 들어 심법요결(心法要訣)을 들었다. 1965년 후손 조운제(趙雲濟)가 유문(遺文)을 수습하여 간행한 2권 1책의 『경모당일고(敬慕堂逸稿)』가 있다.
[묘소]
묘는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 박달령(朴達嶺)[황학산] 아래 부갑(負甲)[동북쪽을 등진 자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말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다. 1980년대에 함안 조씨 입향조 조영개의 후덕함을 기려 그의 후손 조용구(趙鏞九)가 경모당(敬慕堂)을 건립하였으며, 매년 1회 제향하고 있다. 또한 함안 조씨 조영개의 공적비가 있다. 공적비로 인해 이 마을에 장사가 많이 났다는 전설에 의하여 지금도 매년 함안 조씨 후손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