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853
한자 禹弘緖
이칭/별칭 단양(端陽)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용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07년연표보기 - 우홍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30년 - 우홍서 무과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37년 - 우홍서 성균관 전적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38년 - 우홍서 창락도 찰방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40년 - 우홍서 성균관 사성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42년 - 우홍서 개천 군수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70년 - 우홍서 장예원 사의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71년 - 우홍서 장예원 판결사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577년연표보기 - 우홍서 사망
거주|이주지 우홍서 이주지 -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지도보기
묘소|단소 우홍서 묘소 - 봉미산(鳳尾山) 묘좌(卯坐)
성격 관료
성별
본관 단양
대표 관직 인의(引儀)

[정의]

조선 전기 의성에 입향한 관료.

[가계]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성즉(聖則), 호는 만수재(晩修齋). 고려 말 유학자 역동(易東) 우탁(禹倬)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참봉 우즙(禹楫)이고, 할머니는 예천 임씨(醴泉 林氏)이고, 아버지는 전연사(典涓司) 참봉 우수평(禹水平)이고, 어머니는 진사 홍계원(洪啓元)의 딸 부림 홍씨(缶林 洪氏)이고, 부인은 참봉 정정상(丁政祥)의 딸 의성 정씨(義成丁氏)이다. 형 우홍수(禹弘綏)와 함께 의성에 입향하였다.

[활동 사항]

우홍서(禹弘緖)[1507~1577]는 1507년(중종 2)에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이며, 출생 후 형 우홍수와 함께 의성으로 이거하였다. 현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우홍서 후손들의 세거지이다. 우홍서의 관직이나 활동 사항을 전해주는 사료는 그리 많지 않다. 다만 단양 우씨의 족보에 그의 행적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족보에 나타난 그의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530년(중종 25) 무과에 발탁되어 부사과(副司果)에 등용되었으며 1537년에 성균관 전적(典籍), 1538년에 창락도(昌樂道) 찰방(察訪), 1540년 성균관 사성(司成), 1542년 개천(价川)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547년(명종 2) 요승(妖僧) 보우(普雨)가 신에 빌어서 기복하는 요술로 문정 황후의 신임을 얻어 권위를 농락한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양사(兩司) 태학(太學)에서 번갈아 소(疏)를 올려 주살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자 우홍수가 궐문에서 규탄하였다. 1570년(선조 3)년에 장예원(掌隷院) 사의(司議)를 역임하고, 이듬해 판결사(判決事)가 되었으나 당론이 분열되고 조정에 소요가 일어나자, 사림(士林)에게 화가 끼칠 것을 예측하고 형 우홍수와 더불어 의성으로 이거하여 함께 경서를 강연하며 지내다가 1577년에 사망하였다.

[묘소]

묘는 봉미산(鳳尾山) 묘좌(卯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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