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843
한자 申悅道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89년연표보기 - 신열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06년 - 신열도 진사시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신열도 증광 문과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47년 - 신열도 사헌부 장령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659년연표보기 - 신열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58년연표보기 - 신열도 의성 단구 서원에 배향
출생지 신열도 출생지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지도보기
묘소|단소 신열도 묘소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비봉리지도보기
사당|배향지 단구 서원 -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분토리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아주(鵝洲)
대표 관직 능주 목사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字)는 진보(晉甫), 호는 나재(懶齋). 신준정(申俊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수(申壽)이며 아버지는 신흘(申仡)이고, 어버니는 순천 박씨(順天 朴氏)로 박윤(朴倫)의 딸이며, 부인은 문소 김씨(聞韶 金氏)로 김굉(金浤)의 딸이다.

[활동 사항]

신열도(申悅道)[1589~1659]는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6년(선조 39) 진사가 되고, 1624년(인조 2)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서 관직을 시작하였다. 1625년에 박사(博士), 전적, 기사관을 지내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하였다. 그는 형들과 더불어 호란 당시 척화(斥和)를 강력하게 주장하며 화의론을 강력히 비난하였다.

1628년 형조 좌랑(刑曹 佐郞)이 되었으며,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예조(禮曹)·병조(兵曹)·호조(戶曹)의 좌랑(佐郞)을 두루 지내고, 1630년 지제교(知製敎), 1636년 성균관 직강(成均館 直講), 병조 정랑(兵曹 正郞),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을 지냈다.

병자호란 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병자호란 때에도 화의론을 강력히 비난하며 동지들과 상소를 올려 끝까지 항쟁할 것을 주장했다. 이어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檄文)을 초안하여 도내에 포고하고, 각 고을마다 의병을 모아 해서 부원수(海西 副元帥)의 진(陣)으로 보냈다.

이듬해 전란이 끝나자 고향으로 내려왔다가, 1638년(인조 16) 울진 현령(蔚珍 縣令)으로 나아가 민생에 대해 극언하였는데, 인조는 이를 모두 받아들였다. 1645년 공조·병조의 정랑(正郞)에 제수고, 1647년 장령(掌令)을 거쳐 1649년 예천 군수(醴泉 郡守)로 나아갔다가 1652년(효종 3) 장령을 지냈으며, 다시 능주 목사(綾州 牧使)를 지냈다.

1655년 사간(司諫), 성균관 사성(成均館 司成), 종부시 정(宗簿寺 正)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때부터 고향에서 두문불출하며 병환을 다스렸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는 『나재집(懶齋集)』 9권 4책이 있으며, 『선사지仙槎志』와 『문소지聞韶志』 등도 편찬하였다. 『문소지』는 스승인 장현광의 권유로 편찬한 의성현의 읍지이다.

[묘소]

묘는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비봉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분토리에 위치한 단구 서원(丹邱 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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