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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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成陽 |
이칭/별칭 | 금은(琴隱),정헌공(定憲公),정헌(定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광우 |
활동 시기/일시 | 1418년 - 박성양 중군 동지총제에 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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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19년 - 박성양 중군 절제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19년 - 박성양 우군 절제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21년 - 박성양 별시위 절제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21년 - 박성양 경상도 병마 절제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28년 - 박성양 좌군 총제에 임명 |
추모 시기/일시 | 1818년 - 박성양 명곡 서원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868년 - 박성양 이조 판서 성균관 좨주에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868년 - 박성양 정헌공 시호 책봉 |
거주|이주지 | 박성양 은거지 -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분토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함양(咸陽) |
대표 관직|경력 | 이조 참판 |
[정의]
조선 전기 의성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함양(咸陽). 호는 금은(琴隱). 아버지는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한 박윤후(朴允厚), 할아버지는 판윤부사(判尹部事) 박사직(朴斯直), 증조부는 전객령(典客令) 박원두(朴元㺶), 부인은 첨사(詹事) 정승계(鄭承桂)의 딸 정부인(貞夫人) 동래 정씨(東萊 鄭氏)로 알려져 있다.
[활동 사항]
박성양(朴成陽)[?~?]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수학했다고 하며, 고려 왕조의 운이 다하는 것을 보고는 문소현(聞韶縣) 봉두산(鳳頭山)[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봉양면 일대] 아래에 은거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박성양은 금서(琴書)[거문고와 책]로 시간을 보내면서, 스스로 호를 금은(琴隱)이라 하였다. 왕조가 교체된 후 태조(太祖)가 수차례 박성양을 조정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남해안에서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조정에서 천거한 원수(元帥)직을 수행하여, 왜구들을 물리쳤다. 의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천(永川)을 들렸는데, 류방선(柳方善)이 여러 선비를 거느리고 향교에 모여 개선을 환영하며 「향교요(鄕校謠)」를 증시(贈詩)했다고 한다.
왜구를 물리친 후 왕명을 받들어 한양의 근동(芹洞)[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미근동]에 머물며 조정에 나아가 총제(摠制)가 되었고, 이어 경상도 좌영 병마사(慶尙道 左營 兵馬使), 보덕 좌우장사(輔德 左右長史)를 역임하였다. 태종이 즉위한 후에는 전라도 안렴사(全羅道 按廉使), 함경도 북영 병마사(咸鏡道 北營 兵馬使)로 나아갔다.
1418년(세종 즉위년), 세종이 즉위하자 중군 동지총제(中軍 同知摠制)에, 이듬해인 1419년(세종 1)에는 중군 절제사(中軍 節制使)에 임명되는 등 중앙군의 요직에 있었다. 그리고 그해 대마도(對馬島) 정벌이 있었는데, 이때 박성양은 우군 절제사(右軍 節制使)로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세종 3년(1421)에는 별시위 절제사(別侍衛 節制使)와 경상도 병마 도절제사(慶尙道 兵馬 都節制使)에 임명되었다. 1424년(세종 6) 본인에게 부여된 과전(科田)을 김자이(金自怡)와 바꾸려 하다 발각되어 직첩(職牒)을 빼앗겼으나, 이듬해 돌려받았다. 1428년(세종 10)에는 좌군 총제(左軍 摠制)에 임명되었다. 한편 박성양은 대마도 정벌 이후 그 공으로 왕명에 의해 우군 동지총제(右軍 同知摠制)가 되었으며, 이어 가선대부 이조 판서 겸 도총부 부총관(嘉善大夫 吏曹 參判 兼 都摠部 副摠管)에 특승(特陞)되었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박성양의 유고로는 2권 1책의 『금은선생실기(琴隱先生實記)』가 전한다. 『금은선생실기』는 박훈(朴薰)이 편찬하고, 권상규(權相圭)가 교열하여 1948년 간행되었다. 『금은선생실기』 가운데 박성양의 유문은 시(詩) 2수와 서(書) 2편뿐이다. 시는 「만고실정부인정씨(輓故室貞夫人鄭氏)」와 「소남감회(韶南感懷)」이고, 서는 박초(朴礎)에게 보낸 「상족대부토헌선생 초(上族大父土軒先生 礎)」와 허조(許稠)에게 보낸 「답허경암 조 부원서(答許敬菴 稠 附原書)」이다.
[묘소]
『함양박씨송암공파세보』에 따르면, 의성현 금뢰면(金磊面) 봉두산[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분토리] 아래에 묘소가 있다고 하나, 위치를 기록해 두지 못해 단을 쌓고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다. 이언적(李彦迪)이 묘갈명(墓碣銘), 정종로(鄭宗魯)가 묘지명(墓誌銘)을 찬(撰)하였다.
[상훈과 추모]
1868년(고종 5) 이조 판서(吏曹 判書) 성균관 좨주(成均館 祭酒)에 증직되었으며, 정헌(定憲)으로 시호를 받았다. 1818년(순조 18) 명곡서원(明谷書院)[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양지리에 위치]에 배향되었다. 1975년에는 명곡서원 경내에 신도비(神道碑)가 새로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