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8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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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珪煥 |
이칭/별칭 | 규언(圭彦),죽오(竹塢)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856년 6월 16일 - 박규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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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99년 - 박규환 제릉 참봉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박규환 중추원 찬의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박규환 국권 피탈로 낙향 |
몰년 시기/일시 | 1921년 11월 11일 - 박규환 사망 |
출생지 | 박규환 출생지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
거주|이주지 | 박규환 은거지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
묘소|단소 | 학미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
성격 | 유학자 |
성별 | 남 |
본관 | 함양(咸陽) |
대표 관직 | 중추원 찬의 |
[정의]
근대 의성 출신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규언(圭彦), 호는 죽오(竹塢). 아버지는 박필운(朴必運), 어머니는 장욱근(張郁瑾)의 딸 옥산 장씨(玉山 張氏)와 박숭근(朴崇根)의 딸 월성 박씨(月城 朴氏), 할아버지는 박문룡(朴文龍), 증조할아버지는 박이길(朴彛吉), 부인은 진사(進士) 이건영(李健榮)의 딸 숙부인(淑夫人) 경주 이씨(慶州 李氏), 후처는 노영호(盧永昊)의 딸 경주 노씨(慶州 盧氏)로 알려져 있다.
[활동 사항]
박규환(朴珪煥)[1856~1921]은 1856년(철종 7) 6월 16일 죽리(竹里)[현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에서 출생하였다. 7세에 입학을 하였고, 성장해서는 행실에 다른 사람들의 감복함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장인인 이건영으로부터 율시(律詩) 수백 수,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로 된 간독(簡牘) 2권, 『사례약선(四禮略選)』 1권을 받아 항상 가까이 하면서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박규환은 부모의 유명(遺命)으로 과거 공부를 지속하였다. 3년 동안 한성에 머물며 초시(初試)에는 한 차례 합격하였지만 회시(會試)에는 낙방하고 말았다. 과거 공부 도중에 부인 경주 이씨와 어린 자식이 세상을 먼저 떠나 한동안 고향에 내려와 있었지만, 주로 한성에 머물며 공부를 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자, 박규환은 자신의 재주를 모두 펼치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고향으로 낙향하려 했다. 하지만 함께 공부하던 친우들이 만류하여, 서울에 계속 머무르게 되었다.
결국 1899년(광무 3) 처음으로 출사하여 제릉 참봉(齊陵 參奉)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6품의 승훈랑(承訓郞)에 올랐다. 1908년(융희 2)에는 정3품의 중추원 찬의(中樞院 贊議)에 오르게 되나, 1910년 일본에 의해 나라가 강탈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고향에 죽오정(竹塢亭)[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을 짓고 친우들과 담론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1921년 11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개인 사재를 털어 10여 년간 조문국 경덕왕릉의 향사를 지냈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박규환의 유고로는 2권 1책의 『죽오실기(竹塢實紀)』가 남아 있다. 『죽오실기』는 박재을(朴在乙)이 1976년 편찬한 것이다.
[묘소]
처음 선방산(船放山)[대구광역시 군위군]에 장사 지냈으나, 이후 학미(鶴尾)[현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학미리]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에는 박규환이 지은 죽오정(竹塢亭)이 남아 있다. 6·25 전쟁 때 전소되었으나, 후손들이 박규환을 기리기 위해 1986년 5월 복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