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820
한자 柳𥚻
이칭/별칭 숙정(叔整),도암(道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80년연표보기 - 유단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09년 - 유단 사마시에 급제
몰년 시기/일시 1612년연표보기 - 유단 사망
출생지 상주목 관아 - 경상북도 상주시
거주|이주지 생물 -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상가산 - 경상북도 안동시
성격 유학자
성별
본관 풍산(豊山)
대표 관직 익위사 세마

[정의]

조선 후기 단밀현[현 의성군 단밀면]에 거주한 학자.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숙정(叔整). 초명은 존(袸). 호는 도암(道巖). 아버지는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 어머니는 현감(縣監)을 지낸 이경(李坰)의 딸 정경 부인(貞敬夫人) 전주 이씨(全州 李氏), 할아버지는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유중영(柳仲郢), 증조할아버지는 군수(郡守)를 지낸 유공작(柳公綽), 부인은 판결사(判決事) 정사신(鄭士信)의 딸 청주 정씨(淸州 鄭氏)이다. 유단은 4형제 중 셋째로, 백형은 유위(柳禕), 중형은 유여(柳示+如)이고, 동생으로 유진(柳𥘼))이 있다.

[활동 사항]

유단(柳𥚻)[1580~1612]은 1580년(선조 13) 10월, 당시 부친 유성룡의 부임지였던 상주목(尙州牧)의 관아(官衙)에서 출생하였다. 훗날 성장함에 경상북도 상주목 단밀현 생물(生物)[현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로 이주하였고, 후손들도 이곳에 정착하였다.

어릴 때부터 품성이 강명하였으며, 6~7세에 속문(屬文)에 능했다고 한다. 13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백부 유운룡(柳雲龍)을 따라 봉화(奉化)로 피난을 갔지만, 그곳에서도 과업(課業)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8세에 정유재란이 일어남에 곽재우(郭再祐)가 지키고 있던 창녕(昌寧) 화왕산성(火旺山城)에 가서 여러 전략을 함께 강구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와 더욱 학문에 열중하며 명사로 칭송을 얻기 시작했는데, 이덕형(李德馨)이 이런 유단을 일러 훗날 한 시대의 모범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1606년(선조 39) 부친 유성룡이 관직에 물러나 있을 때, 동생 유진, 그리고 정자(正字)였던 김연조(金延祖)와 더불어 학문 연구에 주력하였다.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당시는 북인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였다. 유단은 권귀들이 권력을 농단하고 세도가 험난하다 하여, 벼슬에 뜻을 품지 않고 향촌에 은둔하였다. 당시 안동의 사림으로 교유를 했던 이강(李茳) 형제가 북인의 핵심 인사였던 이이첨(李爾瞻)을 따르자 절교하고 준엄히 꾸짖었다고 한다. 하루는 정구(鄭逑)를 뵙는 자리에서 한 문인이 부친 유성룡을 비난하자 준엄한 말로 이를 반박하니, 정구가 감복했다고 한다. 이후 익위사 세마(翊衛司 洗馬)로 천거되었다.

1611년(광해군 3) 김봉조(金奉祖)와 더불어 부친을 배향하는 병산 서원(屛山書院) 건립을 주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해서(海西)에서 김직재(金直哉)의 아들 김백함(金百緘)이 모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관련자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유단의 동생 유진도 언급이 되었고, 유진은 바로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유단은 동생 유진을 보호하기 위해, 무고함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한성부에 이르러서는 그 담장 아래를 지키며 동생을 걱정하였다. 이런 유단의 모습을 보고 한성부의 여러 신료들이 감복하였으며, 특히 이덕형유단이 이곳에서 병을 얻었을 때 약을 보내고 내의원(內醫院)의 의원을 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병환이 더욱 심해져, 1612년 5월 26일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1권 1책의 『도암집(道巖集)』이 전한다. 『도암집』은 1938년 유단의 후손인 유창식(柳昌植) 등이 간행하였다. 시 8편, 서(書) 2편, 유사(遺事)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묘소]

『도암집』에는 안동부(安東府) 서쪽 상가산(上佳山)에 묘소가 자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봉해졌으며, 조봉대부(朝奉大夫)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증직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6.06.27 한자 수정 𥚻 , 𥘼으로 수정
이용자 의견
정** 공의 휘자와 안항들의 휘자 검토를 요청합니다. 공들의 사마방목과문과방목및 풍산유씨세보 (1758년간행)을 보변 공들의 휘자는 衣변이아니고 示변으로 기록되어 잇어 항열자로 여겨 집니다.
따라서 禕, 示+如, 𥚻 , 𥘼, 𥘉, 䄡으로 표기 하시는것이 바른표기가 아닌지 검토를 앙망합니다.
  • 답변
  • 디지털의성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의주신 내용에 따라 수정하였습니다.
201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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