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만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818
한자 南萬里
이칭/별칭 붕익(鵬翼)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3년연표보기 - 남만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4년 - 남만리 별군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94년 - 남만리 정위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95년 - 남만리 친위 제1대 중대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95년 - 남만리 춘생문 사건으로 체포
활동 시기/일시 1895년 - 남만리 백령도로 유배
활동 시기/일시 1896년 - 남만리 해배
활동 시기/일시 1896년 - 남만리 정위에 복직
활동 시기/일시 1898년 - 남만리 안의 군수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99년 - 남만리 거창 군수 겸 양무감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02년 - 남만리 평택 군수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02년 - 남만리 대정 군수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909년연표보기 - 남만리 사망
부임|활동지 안의군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부임|활동지 거창군 - 경상남도 거창군
부임|활동지 팽택군 - 경기도 평택시
부임|활동지 천안군 - 충청남도 천안시
부임|활동지 대정군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유배|이배지 백령도 -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성격 무관
성별
본관 영양(英陽)
대표 관직 군수

[정의]

개항기 의성 출신의 관료.

[가계]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붕익(鵬翼). 아버지는 남유환(南有煥), 어머니는 김길진(金吉進)의 딸 안동 김씨(安東 金氏)와 전성구(全聖矩)의 딸 용궁 전씨(龍宮 全氏), 할아버지는 남정학(南正學), 증조할아버지는 남헌의(南憲毅), 부인은 이직곤(李直坤)의 딸 진성 이씨(眞城 李氏), 후처는 용궁 전씨(龍宮 全氏)로 알려져 있다.

[활동 사항]

남만리(南萬里)[1863~1909]는 1863년(철종 14)에 출생하였다. 의성 출신의 유학자였던 류도수(柳道洙)에게 종유(從遊)했다고 한다. 일찍이 관직에 진출하여 개화기 신식 군대의 무관으로 활동하였다. 장위영(壯衛營)의 영관(領官)을 역임하였으며, 1894년(고종 31) 별군관(別軍官)과 정위(正尉)에 임명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 농민 전쟁 때에는 관군으로서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의 농민군 상황을 정탐하는 공을 세웠다. 1895년(고종 32) 9월 친위 제1대 중대장이 되었다.

1895년 11월, 남만리는 친위 제1대 중대장으로 있으면서 제2대 중대장과 군사 800명을 이끌고 담을 넘어 입궐을 시도하다 실패한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조정 내 친러파, 친미파, 개화파 대 친일파 간의 무력 충돌 사건으로, 친위 제1대 중대장 남만리는 주동 인사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재판 결과 남만리는 태 100대,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백령도(白翎島)로 유배되었다. 하지만 1896년(건양 1) 초에 징계에서 풀려나 곧바로 정위(正尉)로 복귀하였다.

이후에는 주로 외방의 지방관으로 주로 활동하였다. 1898년(광무 2) 안의 군수(安義 郡守), 1899년(광무 3) 거창 군수(居昌 郡守) 겸 양무감리(量務監理), 천안 군수(天安 郡守)를 거쳐 1902년(광무 6) 3월 평택 군수(平澤 郡守), 같은 해 6월 대정 군수(大靜 郡守)에 임명되었다. 여러 지방관을 역임하며 치적이 있었다고 한다. 한말에 항일 투쟁을 하다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1909년(융희 3)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대정 군수 재임 시절 지방 읍지인 『탐라지(耽羅誌)』를 편찬하였다.

[묘소]

족보에는 묘소가 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신평리에 자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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