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6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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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長春里繼昔巖刻石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장춘리 산77-2 |
집필자 | 김용만 |
조성|건립 시기/일시 | 1895년 - 장춘리 계석암 각석 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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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장춘리 계석암 각석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장춘리 산77-2![]() |
성격 | 각석 |
양식 | 음각 |
관련 인물 | 김재성(金在誠) |
크기(가로) | 50㎝ |
크기(세로) | 65㎝ |
크기(깊이) | 1.2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장춘리에 있는 개항기의 각석.
장춘리 계석암에는 당시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어 건립 경위를 확인할 수 있다. 바위에 새겨진 내용에 따르면, 본래 바위의 이름은 ‘계석(桂石)’이었다. 당시 바위 주변에서 살며 십여 세대를 이어온 선산 김씨의 후손 김재성(金在誠)이 자신의 가계와 이 바위가 변치 않고 ‘옛과 같이 계속 이어져[繼昔]’ 오고 있고, 마침 이런 이어짐을 뜻하는 ‘계석(繼昔)’과 본래 바위의 이름인 ‘계석(桂石)’의 발음이 동일하기 때문에 바위의 이름을 계석암(繼昔巖)으로 고쳐 글씨를 새겼다고 한다.
장춘리 계석암 각석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장춘리에 있다. 장춘리의 항골에서 위천을 따라 북쪽으로 약 150m 정도 올라간 강가 바위벽에 있다.
장춘리 계석암 각석은 강가 바위벽에 해서(楷書)로 음각되어 있다. ‘계석암(繼昔巖)’이라고 큰 글자로 새기고 그 아래 약간의 선각으로 외곽 경계선을 새긴 다음 그 안에 작은 글씨로 계석암의 명칭 유래에 대한 내용을 새겼다.
〈원문〉
계석암(繼昔巖)
천○박지하용연지양○○박연즉(天○朴之下龍淵之陽○○朴淵卽)/오가십여세소거연지남애암호(吾家十餘世所居淵之南厓巖號)/계석역아(桂石亦我) 선유촉소재자암계(先遺躅所在玆巖繼)/석이불변기고오가계석이불이(昔而不變其高吾家繼昔而不移)/기수오유자암창감자다잉용암(其守吾遊玆巖愴感者多仍用巖)/호상사지음제이계석이우계계(號相似之音題以繼昔以寓繼繼)/여석지의운이영력후오을미중양절박연만○생(如昔之意云爾永曆後五乙未重陽節朴淵晩○生)/선산(善山) 김재성근지(金在誠謹識)
〈번역문〉
계석암
천○박(天○朴)의 아래쪽 용연(龍淵)의 양지인 ○○ 박연(朴淵)은 곧 오가(吾家)가 십 여 세대 동안 살아온 곳이다. 박연의 남쪽 언덕 바위 이름이 계석(桂石)이니 역시 우리 선조께서 유촉(遺躅)한 곳이다. 이 바위가 계석(繼昔)하여 그 높이가 변치 않았고, 우리 집안도 계석(繼昔)하여 그 지키며 살기를 옮기지 않았다. 내가 이 바위에서 놀며 슬픈 감정이 많았다. 이에 바위 이름이 서로 비슷한 발음인 것으로써 계석(繼昔)으로 제(題)하여 잇고 이어 옛과 같이 우거한다는 뜻을 이른 것이다.
영력(永曆)[명나라 마지막 왕인 영명왕 연호] 기원 후 다섯 번째 을미년(1895) 음력 9월 9일에 박연 만생(晩生)으로 선산(善山)을 본관으로 쓰는 김재성(金在誠)이 삼가 기록함.
비지정 문화재이며, 보호 시설이나 안내 표지판은 설치되어 있지 않다.
장춘리 계석암 각석은 조성 연대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각자한 사유를 밝혀 놓은 많지 않는 각석 중 하나로서 의미가 있다. 문중의 세거지로 10여 세대를 살아왔고, 계속 이곳을 지키고 이어 가겠다는 의지를 새긴 것이다. 이는 애향심의 표현으로 당시 사람들의 거주지에 대한 애착을 이 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