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452
한자 部曲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김호동

[정의]

삼국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 있었던 특수 지방 행정 구역.

[개설]

부곡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의 "이른바 향·부곡 등의 잡소(雜所)는 모두 갖추어 기록하지 않는다"라고 내용으로, 삼국 시대부터 부곡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특수 행정 구역으로 존재하였던 부곡은 고려 중기 이후 그 성격이 변질되기 시작하여 조선 시대에 이르면서 거의 소멸되었다.

15세기 중엽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가 편찬될 당시 남아 있던 부곡은 68개소였으며, 16세기 전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편찬될 무렵에는 14개소만이 남아 있었다. 의성 지역의 부곡 역시 조선 시대 지리지에 그 이름만 전할 뿐이다.

[조선 시대 지리지에 나타난 부곡]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조선 시대 의성 지역에는 이미 부곡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다. 현재의 의성군 영역은 조선 시대의 의성현·비안현·단밀현·다인현에 해당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해당 군현조를 살펴보면 의성현에는 3개의 부곡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신촌 부곡(新村部曲)은 현 동북쪽 30리에 있었고, 굴어곡 부곡(屈於谷部曲)은 현 남쪽 5리에 있었고, 우곡 부곡(牛谷部曲)은 현 동쪽 20리에 있다고 하여 의성현 치소를 기준으로 방향과 거리만 기록되어 있다. 비안현 고적조에는 퇴곡 부곡(退谷部曲)이 현 동쪽 10리에 있다고 하였고, 신평 부곡(新平部曲)·하필점이 부곡(下筆坫伊部曲)·물실 부곡(勿失部曲)은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 단밀현은 조선 시대 상주목의 속현이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상주목 고적조에 주선 부곡(主善部曲)·단곡 부곡(丹谷部曲)·생물 부곡(生物部曲)이 모두 단밀현(丹密縣)에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부곡의 성격]

『태조실록』을 보면 "고려 왕조 때 5도(五道) 양계(兩界)의 역자(驛子)·진척(津尺)·부곡(部曲)의 주민은 태조 때 명을 어긴 자들로서 모두 천한 역을 지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고려 왕조가 후삼국을 통합할 때 고려에 저항한 호족 휘하의 주민들을 강제로 부곡민으로 편성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주목(驪州牧) 고적조(古跡條)에 있는 등신장(登神莊)에 관한 설명에서는 "신라가 주군현(州郡縣)을 설치할 때 그 전정(田丁)이나 호구(戶口)가 현이 될 수 없는 것은 향 또는 부곡으로 두어 그 소재하는 읍에 속하게 했다. 각각에는 토성이민(土姓吏民)이 있다"고 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부곡은 단지 인구나 토지가 현의 규모에 미치지 못하는 지역으로 군현과 신분적 차별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의성 지역에는 고려 시대에 10개의 부곡이 존재하였는데, 개개의 부곡이 고려 태조 때 명을 어겨 천한 역을 진 곳이었는지, 전정이나 호구가 현이 될 수 없는 지역이어서 부곡이 되었던 곳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 비안현 성씨조에 신평 부곡·하필점이 부곡·물실 부곡에 팽씨(彭氏)가 토성으로 나오고 황(黃)·임(林)씨가 속성(續成)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상주목 성씨조에 단밀현 소속의 주선 부곡·단곡 부곡·생물 부곡에 신(申)씨가 보이는 것을 보면 최소한 위 6개의 부곡은 천민 부락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조선 시대에 들어 10개의 부곡이 각 군현에 병합되었으므로 현재는 그 구체적 위치를 알기 어렵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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