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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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主敎 |
이칭/별칭 | 가톨릭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하창환 |
[정의]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로마가톨릭 교회.
[천주교의 박해와 전래]
의성의 천주교는 박해의 역사로부터 시작된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었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그중 경상도로 유배된 56명 가운데 강성철(姜成喆)이 바로 의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안사면 쌍호동에 서울에서 천주교를 믿다가 박해를 받아 이곳으로 피신해 온 박수광이 살면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관청의 힘이 미치지 않는 깊숙한 오지이면서도 예천·안동 지역과 인접해 있어 한편으로는 은밀히 신앙 생활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옹기를 구워 팔아 생활을 영위하기에 용이하였다. 그래서 자연히 이곳에는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또한 쌍호동에 인접한 안계에는 1868년(고종 5) 병인박해 때 부산 수영장대에서 순교한 양재현의 남은 가족들이 이주해 와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교우촌과 공소의 건립]
갖은 박해를 피해 모여든 사람들에 의해 의성의 천주교는 점차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891년(고종 28) 경상도 지방의 공소를 순회하던 김보록 신부가 쌍호동의 교우촌에서 최초로 성사를 집전하였으며, 1893년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가 다시 이곳에서 견진 성사를 주었을 때는 신도가 12가구 50여 명에 이르렀다. 그 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사라지면서 신도 수는 더욱 늘어나 1934년 8칸의 신축 공소를 건립함으로써 의성에서의 천주교는 완전한 정착을 보게 되었다.
[천주교의 부흥과 구호 물자]
쌍호공소에서 시작된 의성의 천주교는 일제가 공소의 건물과 성물을 징발하려는 기도로 한때 와해의 위기를 맞았으나 이를 극복하고 그 명맥을 이어 갔다. 그러다가 6·25 전쟁 직후 교세가 급작스럽게 확장되었다. 그 이유는 미국 가톨릭 구제회(NCWC)의 구호 물자를 천주 교회에서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한 성당의 세례자가 50명이 넘고 예비자는 200명이나 되었다. 물론 이들이 모두 천주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이 천주교를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외형적으로 교세를 확장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음에는 틀림없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의성 지역에는 의성공소·다인공소·안계공소 등이 생겨났다. 이 공소들은 지속적인 성장을 하여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에 모두 본당으로 승격하였다.
[천주교와 사회적 정의]
1960년대부터 시작된 정부의 공업화 정책으로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농촌의 경제난과 이농 현상이 가속화되자 의성 천주교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천주교에서는 대부분의 신자가 농민인 까닭에 그들의 편에 서서 정부의 반농민적 정책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어려운 농촌 현실을 고발하고, 억울하게 당하는 농민의 고통을 표출한 1984년의 경상북도 농민 대회, 1985년에 있었던 소값 폭락에 대한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소몰이 시위’와 농지 개량 조합의 조합비를 현물로 납부하는 투쟁 등은 모두 성당의 후원과 지지 속에 이루어졌다.
[투쟁에서 생명의 운동으로]
격동의 1980년대가 지나자 의성 천주교의 사목 방향도 서서히 바뀌어 나갔다. 그 동안 투쟁 일변도였던 농민 운동은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도시와 농촌 간의 연결을 통한 우리 농산물의 직거래로 생산자인 농민과 소비자인 도시인 모두를 보호하고, 유기농법을 통해 무공해 농산물을 생산하는 것과 같은 우리의 삶을 밝게 하는 운동으로 변모하였다. 또한 성당 내부에서는 어린이집이나 문화원과 같이 시설들을 건립하여 성당이 지역 주민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천주교 현황]
2012년 현재 의성군에는 3곳의 성당과 6곳의 공소가 있다. 각각의 성당과 공소에 적을 두고 있는 신자 수를 보면, 의성성당이 약 1,800명, 안계성당이 약 180명, 다인성당이 약 990명, 쌍호공소가 약 100명, 탑리공소가 약 70명이며, 상광공소·신락공소·신산공소·곤대공소는 농촌 인구의 고령화로 얼마 되지 않은 노인 신도들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의성군 전체로 보면, 천주교의 교세가 답보 상태 내지는 조금씩 위축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최근에 다행스러운 일은 귀농 인구가 점차 늘어나면서 조금씩이나마 신도들 또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