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4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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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瑞山消費組合 |
영어음역 | Seosansobijohap |
영어의미역 | Seosan Consumer's cooper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지수걸 |
[정의]
1926년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설립된 소비조합.
[설립 목적]
1920년대 서산 읍내장의 상권은 일본인과 중국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신문들은 서산 지역의 상업이 부진하게 된 원인으로 “첫째 자본 문제도 있거니와 대부분은 상업 경영 방침의 불충실, 불친절한 까닭, 둘째 일반 고객의 심리가 외인(外人)의 상회에서 매매(賣買)를 선호하는 까닭” 등을 손꼽았다.
1926년 서산 지역의 1년 총생산물은 금액으로 환산하면 878만 9029원이었는데, 이 가운데 상품화된 생산물은 대략 5.3% 정도에 불과하였다. 사정이 이러하자 서산 지역 유지들이 1926년 말부터 지역 내의 상업 발달과 동시에 소비자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소비조합을 결성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변천]
서산소비조합은 1926년 12월 발기 총회를 열었는데 당시 조합장은 이필은(李弼殷), 사무 이사는 김낙현(金樂賢) 외 3명, 감사는 박우성(朴友性) 외 3명이었다. 당시 소비조합의 중심인물은 김낙현, 유희근(柳熙根), 백낙선(白樂善), 가후영(賈厚永) 등 대부분이 서산 읍내의 유지급 인물들이었다. 창립 당시 서산소비조합은 출자자가 91명이었으며, 해미에 분소를 두는 등 1938년까지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서산소비조합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1920년대 말 한동벽(韓東璧), 윤원숙(尹源淑), 이응우(李應雨), 백남복(白南復) 등 태안 지역 유지들도 낙안상회(樂安商會)를 설립하고 소비조합 활동을 전개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32년 4월 3일자 『동아일보』에는 「전조선협동조합조사」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가 실려 있는데 서산소비조합도 포함되어 있다. 기사에 의하면 당시 서산소비조합의 조합원은 500명, 조합 자금은 5만 원, 1구(口) 금액은 10원, 불입 방법은 1구 4회불(拂), 1인당 소유구(所有口), 취급 품목은 주단·포목·잡화·비료·농기구·곡물·식료품·유기(鍮器) 등이었다고 한다. 당시 조합원은 500여 명, 조합 자금이 5만 원 규모였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서산소비조합은 소비조합 활동 이외에 소작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서산 지역의 지역 사회 운동 단체들과 여러 가지 연대 활동을 전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1927년 12월 서산노동조합, 서산청년회, 의법청년회, 『조선일보』·『동아일보』·『중외일보』의 각 지국·분국 등 11개 단체와 함께 불량 지주와 악습[소작료의 2중 운반, 운반비 강제 징수]을 폐지할 것을 토의하여 가결한 뒤 불량 지주 및 마름들에게 경고문을 발송하는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서산소비조합은 1929년 4월에는 경성에서 열린 협동조합운동사 제7회 정기 대회에도 참여했으며 1938년까지 활동을 지속하였다.
[의의와 평가]
1920년대 초반부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물산장려회 등의 주도로 소비조합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2년 3월에는 공주, 1923년 11월에는 당진, 1925년 10월에는 홍성, 1926년 11월에는 예산 등지에 소비조합이 결성되었다. 이들 소비조합은 협동 구매를 통해 중간 이윤을 배제함으로써 소비자들의 경제적인 이익을 보장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1926년 12월 서산소비조합이 창립되었다는 사실은 서산 지역에도 이와 같은 근대적인 ‘협동조합 운동’이 본격화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