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4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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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進士襲擊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지수걸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894년 4월 - 이진사 습격 사건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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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장소 | 충청남도 서산군 운산면 보현동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보현동 |
성격 | 농민 운동 |
[정의]
1894년 4월 충청남도 서산군 운산면 보현동에서 발생한 동학 농민군의 재지 양반 습격 사건.
[역사적 배경]
서산 지역에 동학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894년 동학 농민 전쟁이 발발하기 몇 년 전쯤이었다고 한다. 서산·태안 지역을 포함하여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에 동학이 급속하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1907년 천도교의 제4대 교주로서 활약한 덕산 출신의 박인호(朴寅浩) 때문이었다. 박인호 등 동학의 초기 지도자들은 1890년 들어 서산 지역을 포함한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에서 포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결과 많은 신도를 포섭할 수 있었다.
당시 농민 전쟁에 참여한 홍종식(洪鐘植)에 의하면 서산·태안 지역의 농민들은 1894년 농민 전쟁 당시 동학이 들어오자마자 불과 며칠 만에, 하루에 수십 명씩 입도를 하여, 마치 봄 잔디에 불붙는 듯한 형국이었다. 이로써 서산 지역 일대는 불과 보름에서 한달 안에 군 전체가 거의 동학화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 결과 1894년 5월경에는 마을마다 포 조직이 만들어지고 매일 밤 동학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산골짜기 마다 울려 퍼졌다. 사정이 이러하자 지방 수령이나 사족들의 농민 억압, 특히 동학 교도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다.
[경과]
서산 지역의 경우 1894년 4월경 이미 농민군이 초보적인 무장을 한 가운데 집단적으로 지역 내의 양반을 징치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충청도 면천[현재의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면]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던 김윤식의 『면양행견일기(沔陽行遣日記)』에 보이는 운산면 보현동[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보현동으로 추정] 이진사 습격 사건은 서산 지역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당시 농민군들은 서울 양반의 후예인 이진사가 특별히 동학 교도를 탄압하는 데 앞장서자 그를 징벌하기 위해서 통문을 작성하여 마을마다 돌린 뒤 홍주 운천면 원벌[현재의 서산시 운산면 원벌리]에서 일종의 ‘집회’[취회]를 열고 이진사의 집을 습격하였다고 한다. 당시 서산 지역 농민군은 집단을 이루어 인근의 개심사 등지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농민군들이 지역 내 양반들을 징치하거나 부호가를 습격하여 군수 물자를 모으는 일은 당시 전국 각지에서 흔히 벌어지던 일이었다. 사정이 이러하자 각지의 유생들은 민보군이나 유회군을 조직한 뒤,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서산 지역 농민군들은 이진사가 지역 주민들에 대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자 ‘항복한 자는 죽이지 않는다’[降者不殺]는 명분을 앞세워, 그를 돌려보냈다고 한다.
[결과]
서산 지역에서 농민 전쟁이 본격화한 것은 1894년 10월 1일[양력 10월 29일]이었다.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9월 14일 태안군수 신백희(申百熙)와 종친부에서 파견된 별유사 김경제(金慶濟)가 서산·태안 지역의 동학 교도를 복종시킬 목적으로 동학 두령들을 체포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이 예포대도소에 보고되고, 또 9월 30일 경 최시형의 ‘기포 훈시문’이 도달하자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의 동학 농민군은 거의 전 지역에서 봉기하기 시작했다. 운산면 보현동에서 벌어진 이진사 습격 사건은 서산 지역 농민 전쟁의 효시가 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