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022
이칭/별칭 경주 김씨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유계2리 한다리마을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해준

[개설]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유계2리 한다리마을경주 김씨의 동족 마을이다. 한다리마을은 서산시의 동남쪽으로, 음암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7㎞ 거리에 있다. 마을의 동남쪽 전방으로 대교천(大橋川)이 흐르고, 그 주변에는 넓은 농경지인 매벌들이 펼쳐져 있다. 이러한 현재 모습은 남쪽에 서산 A지구 방조제가 건설된 이후의 지형이다. 이전까지 서해 바다는 내륙 깊숙이까지 훨씬 더 들어와 있었고, 대교천의 수량도 지금과 큰 차이가 있었다. 대교천은 서산과 해미를 이어주는 큰 길목에 있어 이 하천을 건너는 다리가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한다리[대교(大橋)]’였다. 조선 후기의 지리지와 고지도에 모두 ‘대교’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이 하천을 위치에 따라 상류는 ‘용유천(龍遊川)’, 하류는 ‘대교천’이라 불렀다.

대교천유계리 앞에서 활처럼 굽으면서 깊은 수심을 이룬다. 이 물길의 아름다움은 1619년에 편찬된 서산의 사찬 읍지 『호산록(湖山錄)』에도 “다리 아래에 발을 드리우고 맑게 흘러가는 물을 굽어보면 눈 같은 비늘을 가진 고기들이 무수히 떼 지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라는 글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대교천을 끼고 있는 한다리마을은 뒤편이 나지막한 야산 지대로 되어 있다. 이 일대에서 석실분(石室墳) 군락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고분군은 파괴되어 그 시대를 편년하기 어렵지만, 조선 시대 이전부터 이미 사람이 살기에 좋은 환경이었음을 보여 주는 역사적 흔적이다.

지금의 유계리는 조선 시대에 동암면(銅岩面)에 속한 유산리(遊山里), 명계리(明溪里), 대교리(大橋里), 기촌(機村) 등 4개 동리를 합친 것이고, 경주 김씨가 세거한 마을은 유계2리로 편제된 옛 대교리 지역이다.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조선의 성(姓)』에 음암면 유계리경주 김씨 25가구가 거주하는 집성촌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늘이 정해 준 터 한다리마을]

안주목사를 지낸 김연(金堧)[1494~?]이 조선 시대 명종[재위 1545~1567] 대에 만년의 은거지로 서산을 택하였고, 그의 큰 아들인 김호윤(金好尹)[1534~?]에 의해 경주 김씨가 세거하게 되었다. 김연은 고려 후기의 충신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의 후손으로 무과 급제 후 서흥부사가 되어 대도 임꺽정을 토벌하고 안주목사를 지냈다. 원래 이 집안은 대대로 경상도 안동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김연은 한양 저동에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인연으로 서산에 터를 잡게 되었을까.

구체적인 이야기는 전하지 않지만, 가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김연의 조부 김희(金僖)가 근녕군(謹寧君) 이농(李禯)[1401~1461]의 딸과 혼인한 사실이 주목된다. 이농태종의 아들이며, 그의 처가 태안군부인 하양 허씨였다. 군부인 앞에 붙는 읍호는 대개 본인이나 남편의 관향이나 기타 연고지가 대부분이었으므로, 허씨 부인은 태안과 깊은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에는 대체로 자녀들의 성별과 관계없이 재산이 공평하게 분배되었으므로, 허씨 부인이 소유했을 태안 일대의 토지와 왕자에게 주어진 강력한 경제력이 더해져 대대로 후손들의 삶의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김연이 서산에 자리를 잡게 되는 경제적 배경으로 외증조모인 허씨 부인과의 관련성도 추적해 볼 수 있다.

[서산에 자긍심을 심어 준 경주 김씨]

김연이 서산을 세거지로 택한 이후 그 후손들이 중앙의 요직에 진출함은 물론, 서산에서의 향촌 활동에도 깊숙이 관여하였다. 『호산록』김연의 아들 김호윤김호열(金好說)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매우 자세하다. 김호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효릉참봉으로 의병을 일으켰고, 김호열은 1564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역시 임진왜란을 당해 서산의 사족들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하였다. 서산의 경주 김씨김호윤·김호열이라는 걸출한 두 형제의 배출 이후 인근의 유력 성씨와 혼맥을 이어가며 가문 간 결속력을 강화하였고, 서산에서의 향촌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재지기반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까지 경주 김씨 문중은 서산의 대표적인 유력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가문이 일어난 것은 입향조 김연의 5대손 김적(金積)부터였다. 그에게는 네 아들 김홍익(金弘翼)[1581~1636], 김홍양(金弘亮)[1588~1624], 김홍필(金弘弼)[1596~1646], 학주(鶴州) 김홍욱(金弘旭)[1602~1654] 등이 있었다. 김홍익은 병자호란 중 근왕병을 이끌던 중 전사하였고, 둘째는 장사랑공, 셋째는 교관공이며, 막내 김홍욱의 후손이 비로소 서산에서의 한다리 김씨 가문을 부흥시켰다.

대대로 관직에 나아가 활약한 김호윤의 아들 김적송곡사에, 김적의 아들인 김홍욱성암서원에 제향되었다. 또한 정려나 신도비 등의 유적 건립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17세기에 이르러 경주 김씨가의 위세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특히 김홍욱의 4세손인 김한구(金漢耉)의 맏딸이 영조(英祖)의 계비[정순왕후]로 책봉되어 정치에 직접 관여함으로써 경주 김씨는 조선 최고의 명문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서산의 자랑, 경주 김씨가의 역사 유산]

유계리 일대에는 경주 김씨가와 관련된 많은 문화 유적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도 마을의 경관을 가장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두 채의 전통 고택으로 정식 문화재명은 ‘정순왕후 생가’와 ‘김기현 가옥’이다. ‘정순왕후 생가’는 김홍욱이 연로한 아버지 김적을 모시고 있음을 안 효종(孝宗)이 그에게 하사한 가옥이다. 이 집에서 정순왕후가 1745년(영조 21)에 태어남으로써 ‘정순왕후 생가’라고도 불린다. 임금이 하사한 주택답게 일반 살림집보다 화려한 양식을 자랑한다. 이 고택의 입구에는 집을 지키는 듯 우람한 느티나무 고목이 서 있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가까운 곳에 자리한 김기현 가옥은 1800년대 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가옥의 형태는 일반 양반가에 비해 간소한 편이다. 이 고택의 입구에도 은행나무 고목이 자리하고 있다.

유계리 앞을 지나는 옛 길가에는 충신 김홍익 정려와 효자 김유경 정려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김홍익은 입향조 김연의 증손자이며 김홍욱의 장형이다. 1632년 연산현감으로 재직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근왕병을 모집하여 경기도 광주에서 전투 중 전사하였고, 이때 통인(通引) 장사정(張士貞)은 그의 시신을 안고 나오다 또한 적군의 칼에 맞아 죽었다. 후에 장사정의 처도 목을 매어 자결하니, 1741년(영조 17)에 세 사람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가 내려졌다.

김유경(金有慶)[1669~1748]은 김두징(金斗徵)의 아들로, 높은 벼슬에 올랐지만 평소 ‘의(義)’를 중시하여 목숨을 걸었던 선비였다. 주장을 굽히지 않는 상소로 인해 파직과 유배라는 험한 길을 걸었지만 끝까지 뜻을 꺾지 않았다. 영조로부터 평안감사를 제수 받았지만, 부친이 돌아가신 후 시묘를 위하여 이를 거부할 만큼 지극한 효를 실천하였다. 후에 그 사실이 널리 알려져 1761년(영조 37)에 ‘효정(孝貞)’의 시호와 효자 명정을 받았다. 정려각은 동네에서 약간 떨어진 취령봉 남쪽 기슭 도로가에 있었는데, 1975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그밖에 지곡면과 대산면에도 경주 김씨가의 유적이 분포하고 있어 서산시 일대에 한다리 김씨 후손들이 넓게 확산되어 거주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신선이 찾아드는 대교천 단구대]

대교천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은 옛 사람들의 삶과 정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곳에는 김홍욱의 아버지 김적이 머물렀던 흔적이 남아 있다. 김적광해군 시절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 한다리마을로 돌아와 거주하였는데, 마음을 달래고자 용유천에 배를 띄워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이때 용유천 아래에 맑은 못이 있어 그 안의 괴암이 모두 보이는 자리에 대(臺)를 쌓았다. 그리고 이곳을 ‘밤낮으로 밝고 신선이 산다.’는 의미로 ‘단구대(丹丘臺)’라 이름 지은 후 자신의 호도 단구자(丹丘子)라 하였다. 그의 아들 김홍욱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이곳에 와서 부친을 모시고 효성을 다하였다 전한다. 김홍욱의 문집 『학주집(鶴洲集)』에도 단구대에 올라 쓴 7언 율시가 전한다.

병구승흥건여비(病軀乘興健如飛)

계상암정일경미(溪上巖亭一逕微)

대주당가료적의(對酒當歌聊適意)

등산림수차망귀(登山臨水且忘歸)

무변락목경추서(無邊落木驚秋序)

부진장림대석휘(不盡長林帶夕暉)

직도야심환미필(直到夜深歡未畢)

임교상로습인의(任敎霜露濕人衣)

한편 대교천덕지천의 합수 지점에서 북으로 150m 정도 올라가면 ‘용유대(龍遊臺)’라 불리는 바위 군락이 있다. 높이 2~5m에 이르는 둥근 달걀 모양의 바위 6~7개와 십 수 그루의 소나무가 만들어내는 풍광은 매우 특이한데, 용이 와서 놀던 곳이라는 뜻으로 지은 ‘용유대’란 명칭에서도 그 신비감을 짐작할 수 있다. 용유대의 서쪽 천변에 있는 큰 바위의 평평한 면에는 ‘단구김선생유상고허(丹丘金先生遊賞古墟)’라는 9자가 세로로 새겨져 있고, 상단부에는 김적이 벼루로 이용했다고 하는 네모진 구멍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01.24 한자 이름 수정 이농(李襛)->이농(李禯)
이용자 의견
정** 근녕군(謹寧君)의 휘자 襛을 禯으로 수정하여 주십시오 근녕군의 휘자는 衣변이 아니고 示변입니다.
  • 답변
  • 디지털서산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내주신 내용을 반영하여 수정하였습니다.
2017.01.23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