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장서 운동을 낳은 성주의 독립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1341
한자 巴里長書運動-星州-獨立運動
영어공식명칭 Seongju’s Independence Movement That Gave Birth to ‘Paris Jangseo-undong’ (Movement for Sending A Long Petition to Paris International Peace Conferenc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정의]

근현대 일제 침략과 일제 강점에 항거한 성주 유림의 항일 독립운동.

[일제 침략에 외교적 방략으로 대응하다]

1894년 갑오변란(甲午變亂)과 1895년 명성 황후(明成皇后) 시해 및 단발령으로 이어지는 일제의 침략 앞에서 충청북도 제천의 의암(義菴) 유인석(柳麟錫)[1842~1915]이나 안동의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1777~1861]을 잇는 정재 학맥의 유림이 ‘거의소청(擧義掃淸)’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의병 항쟁으로 대응했던 것과는 달리 성주 유림은 무력 항쟁에는 반대하고 나섰다. 성주 유림 중에서도 이승희(李承熙)를 비롯한 일부 유생들이 의병을 논의한 적은 있었지만, 곽종석(郭鍾錫)이 ‘오합지졸로는 대사를 이룰 수 없다’고 하며 반대하여 의병은 일어나지 못하였다.

성주 유림은 의병보다는 외교적 방략에 무게를 두었다. 이들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대응으로 만국공법(萬國公法)을 바탕으로 한 서양 여러 나라와의 외교에 힘쓰기를 주장하였다. 성주 유림은 공법을 ‘인의(仁義)’에 근본을 둔 유교적인 시각으로 이해하고 방향을 제시하였다. 비록 무력 항쟁보다는 외교적 방략에 방점을 두었다는 한계는 있었지만, 외세 침략에 외교적으로 대응하려 했던 현실 대응 인식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1896년 곽종석을 비롯한 이승희와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 등 성주 유림이 각국 공사관에 「포고 천하문(布告天下文)」을 보낸 일이나, 1919년 3월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보낸 ‘파리 장서 운동’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한주 학맥을 계승한 성주 유림, 애국 계몽 운동에 나서다]

경상북도 성주는 전통적으로 한주 학맥(寒洲學脈)을 계승한 유림이 뿌리를 강하게 내린 곳이다. 그런데 한말 국권 회복 운동에서 유림이 강한 곳에서는 의병이 강하고 계몽 운동이 약했던 모습과는 달리 성주는 의병 항쟁보다는 외교 활동을 비롯한 계몽 운동이 더 강하였다. 이것은 곧 성주 유림의 사상과 현실 인식의 반영이었다.

성주 유림은 퇴계(退溪) 학맥에 속한 남인들이었는데, 여기에는 두 계열, 월항면 대산리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을 정점으로 하는 계열과 초전면 고산리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을 중심으로 하는 계열이 있었다. 이진상은 ‘심즉리(心卽理)’를 표방한 철저한 주리론(主理論)의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퇴계학파의 정통 학설인 이발기발설(理發氣發說)과 차이를 가짐으로써 경상북도 안동 지역 유림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주 지역에서는 이진상의 아들 이승희에 이어 장석영(張錫英), 곽종석, 김창숙(金昌淑) 등으로 이어지는 한주학파라는 커다란 학맥을 형성하였다. 한편 송준필은 경상북도 칠곡(漆谷)의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와 안동의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학문을 계승하면서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을 주장하여 이진상과는 차이를 보였다.

조선 말 개항기에 안으로는 전근대적인 요소를 혁파하여 근대 사회를 일구어내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막아서 무너져 가는 나라를 붙잡아 자주 독립을 이루어내려는 큰 흐름을 애국 계몽 운동이라 한다. 이 운동은 신교육 진흥과 산업 육성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는데, 서울에서 1904년 국민교육회의 결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성주 지역 계몽 운동은 대한협회 성주지회의 활동과 국채 보상 운동이 중심을 이루었다. 대한협회는 1907년 11월 서울에서 창립된 정치 단체인데, 교육 진흥과 산업 육성을 바탕으로 국권을 회복하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성주 지역에서는 1908년 11월 1일 대한협회 성주지회 설립 발기회를 열고 서울 본회에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대한협회 성주지회는 1907년 11월 29일 본회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고 12월 8일 총회를 열었다. 여기서 회장 박의동(朴儀東), 부회장 이덕후(李德厚)를 비롯하여 여러 임원들이 선임되었다. 심산(心山) 김창숙은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대한협회 성주지회 임원에는 이처럼 성주 유림이 많이 참여하였다. 말을 바꾸면 성주 유림은 성주 지역 애국 계몽 운동에 앞장을 서고 있었다.

김창숙은 “우리가 대한협회 성주지회를 설립하는 것은 장차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 나라를 구하려면 마땅히 구습의 혁파부터 시작해야 하고, 구습을 혁파하고자 하면 마땅히 계급의 타파부터 시작해야 하며, 계급을 타파하고자 하면 마땅히 우리들의 회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전통 유림과는 분명히 다른 혁신적인 주장이었다. 대한협회 성주지회 부회장 이덕후의 맏아들도 대한협회 간사원으로, 차남 이우정(李愚正)과 삼남 이우필(李愚弼)은 교남교육회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대한협회 본회가 친일로 기울어지면서 많은 문제를 낳았다.

교남교육회는 서울에 거주하는 영남 출신 인사들이 영남 지역의 교육 진흥을 내세우며 설립한 교육 계몽 단체이다. 1908년 3월 14일 발기인 대회를 열고, 서울 보광학교에서 145명이 참여한 가운데 결성하였다. 이때 성주 사람으로는 이우정과 이우필 형제를 비롯하여, 도헌모(都憲模), 이윤(李潤) 등 11명이 참여하였다. 또 김창숙국채 보상 운동으로 모은 돈으로 1910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청천서당(晴川書堂)[경상북도 유형 문화재]에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였다. 이때 성주 유림들은 “김창숙이 나와서 청천서원이 망한다.”고 공격하였지만, “유림의 뜻에 순응하여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이를 막는 것은 새로운 영재를 양성하여 다른 날 통유(通儒)를 기다림만 못하다.”라고 하여 일축하였다.

[국채 보상 운동에 나서다]

국채 보상 운동은 대한제국 백성 2000만 명이 석 달 동안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모아 나라의 빚을 갚는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경제적 민족 운동의 한 모습이다. 국채 보상 운동은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大邱廣文社) 문회(文會)에서 김광제(金光濟)와 서상돈(徐相敦)의 발의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경상북도 성주에서는 1907년 3월 20일 한주 이진상의 아들 이승희를 비롯한 유림의 주도로 국채보상의무회가 조직되면서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승희·이덕후·배우홍(裵遇鴻) 등이었다. 이승희는 1907년 3월부터 향중에 통문을 돌려 경상남도 지방의 호소문을 짓고, 향약의 조직 원리를 바탕으로 국채보상회 조직 규칙도 만들었다.

1908년 성주의 국채보상의무회 회장 이승희가 연해주로 망명하자 김창숙이 이를 이끌었다. 김창숙은 1910년 4월 서울에서 열린 국채보상금처리회 전국 대표자 대회에 성주군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렇지만 여기에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 세력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에 낙담하고, 국채보상금처리회를 탈퇴하고 돌아왔다. 성주 지역에서 모금한 국채 보상금 10여만 원은 결국 학교 설립 등 교육 사업에 활용되었다.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과 자정 순국의 길을 걷다]

1910년 8월, 나라가 망하자 일제 강점에 대한 저항으로 유림 중 어떤 이는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망명길을 택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목숨을 던져 자정 순국(自靖殉國)의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 성주에서는 이승희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나섰고, 장기석(張基奭)[1860~1911]·정재기(鄭在夔)[1851~1919]·이경환(李慶煥)[1902~1929] 등이 자정 순국의 길을 걸었다.

경상북도 성주 지역 국채 보상 운동을 이끌던 이승희는 1908년 4월 부산을 출발하여 5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이상설(李相卨)[1870~1917]·안중근(安重根)[1879~1910]·유인석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칠 방법을 찾다가 1909년 만주 밀산부로 가서 한흥동(韓興洞)을 개척하고 한인 동포들의 조직을 건설하였다. 1913년 만주 안동현(安東縣)으로 무대를 옮겨 공교회(孔敎會) 운동을 추진하는 한편, 펑톈[奉天] 덕흥보(德興堡)의 황무지를 개척하여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려 했으나 영농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 펑톈 서탑에서 공교회 운동에 전념하다가 1916년 2월 세상을 떠났다.

장기석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 출신이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뒤 성주군수로부터 일본 국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에 참석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군수의 신고로 1910년 12월 7일 성주경찰서에 끌려가 수감되었다. 이날부터 음식을 전폐하였다. 12월 9일 대구 감옥으로 옮겨졌다가 1911년 1월 5일, 단식 27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정재기경상북도 성주군 청파면 수성동[현 수륜면 수성리] 출신인데, 1919년 3월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 장서(巴里長書)에 유림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이 일로 성주경찰서의 호출 통지를 받자 이에 불응하고, 다음날인 1919년 4월 9일 새벽에 자결 순국하였다. 이경환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용흥리 출신이다. 1928년 11월 25일 교토에서 일본 국왕 히로히토[裕仁]에게 조선 침략의 부당함과 조선 총독부의 철폐를 직소(直訴)하려다가 잡혀 징역 6월형을 살고, 귀국한 뒤 이에 대한 항거로 목매어 자결하였다. 1910년대 경상북도 성주 지역 유림들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 계획과 자정 순국은 1919년 파리 장서 운동3.1 운동의 토양이 되었다.

[파리 장서 운동의 연장, 성주의 3.1 운동]

파리 장서 운동은 유림의 독립 청원 운동으로 ‘제1차 유림단 의거’라고도 한다. 파리 장서는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 유림 대표 137명이 연명으로 한국의 독립을 국제 사회에 청원한 긴 글을 말한다. 파리 장서 운동의 배경에는 3.1 운동 「독립 선언서」의 민족 대표에 유림 대표가 빠진 데 대한 양반 유생들의 상실감과 친일 인물들이 「독립 불원서」라는 글을 일본 정부에 보내려 했던 음모에 대한 분노가 섞여 있었다.

파리 장서는 면우(俛宇) 곽종석의 요청으로 경상남도 산청 출신이자 곽종석의 제자인 중재(重齋) 김황(金榥)과 경상북도 성주 출신이자 지기인 회당(晦堂) 장석영에 의해 초안본이 작성되었다. 곽종석은 경상남도 거창에 있는 사저에서 심산 김창숙과 함께 이를 저본(底本)으로 하여 파리 장서 발송본을 완성하였다.

발송본은 스승 곽종석의 지시에 따라 연서인 120명의 명단과 함께 김창숙이 소지하고 1919년 3월 15일 새벽 거창을 출발하였다. 김창숙은 먼저 서울에 도착하여 서울에서 활동하는 재경 유림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하는 호서 계열에서도 임경호(林敬鎬)가 파리 장서를 작성해 가지고 서울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김창숙은 임경호를 만나 그들의 활동과 목적이 서로 같은 것임을 확인하고 양측의 계획을 하나로 통합하기로 합의하였다.

파리 장서는 영남 계열의 발송본 문서를 수정하여 사용하기로 하고, 연서인의 명단은 곽종석을 비롯한 영남 계열 유림 120명과 김복한을 비롯한 호서 계열 유림 17명을 합한 137명의 명단으로 확정하였다. 김창숙은 수정하여 확정된 문서를 가지고 1919년 3월 23일 저녁 10시 용산역을 출발하였다. 김창숙은 열차로 펑톈을 거쳐 3월 27일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파리 장서는 다시 한문본 3,000부와 영문본 2,000부로 작성된 뒤 파리 평화 회의와 외국 공사관를 비롯한 각 유관 기관과 국내 모든 향교에까지 발송하였다.

파리 장서는 여러 차례 수정된 뒤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 파리 강화 회의 의장에게 발송되었다. 그러나 가장 마지막으로 수정 발송된 파리 장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파리 장서 운동심산 김창숙을 비롯한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 회당 장석영 등 성주 유생들이 주도하였다. 또 성주에서 파리 장서에 서명한 사람도 15명으로 전국의 군(郡) 가운데에서 가장 많았다.

파리 장서 운동은 유림의 3.1 운동이었다. 3.1 운동이 일제 강점에 항거하여 한국의 독립을 선포한 것이라면, 파리 장서 운동은 세계 열강에게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그 한 가운데에 김창숙, 송준필, 장석영 등 성주 유림이 있었다.

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경상북도에서는 3월 8일 대구 서문 시장 만세 운동을 시작으로 하여 5월 7일 청도군 매전면 구촌리 만세 운동에 이르기까지 두 달 동안 90여 차례 전개되었다. 성주 지역에서는 3월 27일 선남면 소학리가천면 동원리 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해서 4월 6일 대가면 도남리월항면 안포리 만세 시위에 이르기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1919년 3월 27일 성주 선남면 만세 운동은 선원리이현기(李玄琪)가 마을 주민 20여 명을 모아 일으켰다. 이현기는 이튿날도 성주읍장 군중 사이에서 1인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게 붙잡혔다. 성주군 가천면 동원리에서는 이상해(李相海)가 동민 10여 명과 함께 마을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창천주재소(倉泉駐在所)로 붙잡혀 갔다.

경상북도 성주 지역 만세 운동은 1919년 4월 2일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성주읍장 만세 운동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유림 세력과 개신교 세력이 연합하여 펼친 만세 운동으로 그 규모도 3,000여 명이나 되었다. 전국 유림의 궐기를 촉구한 공산 송준필의 격문 「국내 통고문」은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보내는 파리 장서 운동에 이어, 군내 유력한 양반들의 성주읍장 만세 운동의 참여를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 4월 2일 성주읍장 만세 운동에서는 성주 유림 수십 명이 시장 한복판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수천 명의 군중이 함께 일어났다. 이때 출동한 일제 경찰들에게 중심인물들이 다수 붙잡혀 갔다. 분노한 군중들이 경찰서 쪽으로 전진하던 중 경찰의 발포로 9명의 사상자를 내고 수십 명이 붙잡혔다. 성주읍장 만세 운동으로 붙잡힌 인물들이 조사 받는 과정에서 파리 장서 운동이 발각되었다. 그 결과 이 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유생들이 잡혀 대구지방법원 검사국까지 끌려가 조사를 받는 고초를 겪어야만 하였다.

성주읍장 만세 운동 다음 날인 4월 3일에는 성주군 지사면 수륜동[현 수륜면 수륜리] 만지(蔓支) 시장에서 청파면 신정동[현 수륜면 신정리]의 장명준(張命俊) 등이 만세 운동을 일으키려다 일본 경찰에게 붙잡히면서 중단되었다. 성주 지역 마지막 만세 시위로는 4월 6일 대가면 도남리김팔수(金八洙) 등 10여 명이 대가면 후포(後浦) 뒷산에 올라가 만세 운동을 일으켰고, 월항면 안포리에서는 이동근(李東根) 등 20여 명이 만세 운동을 펼쳤다.

경상북도 성주군 만세 운동은 3월 27일 선남면 소학리 만세 운동으로 시작되고, 4월 2일 성주읍장 만세 운동에서 정점을 이룬 뒤, 4월 6일 월항면 안포리 만세 운동으로 마무리되었다. 특히 성주읍장 만세 운동은 유림 세력과 개신교 세력의 연합이라는 모습을 보였으며, 그 한 중심에는 파리 장서 운동에 참여했던 양반 유생들이 있었다. 성주 지역의 만세 운동은 파리 장서 운동의 연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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