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827
한자 李德厚
영어공식명칭 I Deokhu
이칭/별칭 경재(景載),면와(勉窩)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5년 12월 15일연표보기 - 이덕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5년 - 이덕후 항일 언론 투쟁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이덕후 성주 지역 국채 보상 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07년 3월 - 이덕후 성주국채보상의무회 부회장으로 추대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이덕후 대한협회 성주지회 부회장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 이덕후 제1차 유림단 의거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30일 - 이덕후 제1차 유림단 의거로 붙잡혀 대구지방검찰청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음
몰년 시기/일시 1927년 6월 24일연표보기 - 이덕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5년연표보기 - 이덕후 건국 포장 추서
출생지 이덕후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이덕후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지도보기
활동지 이덕후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성주군 국채보상의무회 부회장|대한협회 성주지회 부회장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경재(景載), 호는 면와(勉窩). 조선 후기 문신 완석정(浣石亭) 이언영(李彦英)[1568~1639]의 10세손이다. 아버지는 이만수(李萬洙)이다.

[활동 사항]

이덕후(李德厚)[1855~1927]는 1855년(철종 6) 12월 15일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에서 태어났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896년 이승희(李承熙)·곽종석(郭鍾錫)·이두훈(李斗勳)·장석영(張錫英) 등과 함께 일본의 야만적 행위를 규탄하는 격문 「통고천하각국공관문(通告天下各國公館文)」을 지어 각국 공사관에 보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되자 이승희 등과 함께 배일 상소를 올리는 등 항일 언론 투쟁에도 참가하였다. 1907년 3월 성주군 국채보상의무회에 참여하여 회장 이승희를 도와 부회장에 추대되었고, 1908년 11월에는 대한협회 성주지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11년에는 1908년 5월에 연해주(沿海洲)로 망명한 이승희를 찾아 이승희의 셋째 아들 이우필(李遇弼)과 함께 북만주 밀산부(蜜山府)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919년 3월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곽종석·김창숙(金昌淑) 등이 파리 장서[독립 청원서]를 작성하여 제출할 때, 한국 유림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1919년 3.1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독립 선언문이 발표되었으나 민족 대표에 유림 측은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에 곽종석·장석영·송준필(宋浚弼)·김창숙 등이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에 긴 문장의 글, 곧 장서를 보내 한국의 독립에 대한 유림의 진정한 의사를 밝힘과 동시에 한국의 독립에 대한 국제 사회의 협조를 요청하고자 하였다.

파리 장서는 김창숙이 가지고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서 파견된 김규식(金奎植)과 파리 강화 회의 의장 및 국내 각 향교 등에 발송하였다. 파리 장서 운동[제1차 유림단 의거]은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 과정에서 서명자였던 송회근(宋晦根) 등이 붙잡히면서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다. 파리 장서에 서명한 전국 유생들이 일제 군경에 줄줄이 붙잡히게 되면서, 이덕후도 붙잡혀 온갖 고초를 겪다가 1919년 4월 30일 대구지방검찰청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1927년 6월 24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 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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