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1317
한자 心卽理說
영어공식명칭 Simjeungniseol
분야 종교/유교,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8-5[대산리 30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수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배경 지역 성주 한개 마을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8-5[대산리 308]지도보기

[정의]

1861년 성주 출신 성리학자인 이진상이 주장한 심(心)이 곧 이(理)라는 학설.

[개설]

조선 후기 성리학자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이 44세에 지은 글로 자신의 성리학적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진상심즉리설(心卽理說)은 명칭 면에서 왕양명(王陽明)의 심설(心說)에서 제시한 기본 명제와 동일하게 보이나, 이진상은 자신의 심즉리설의 의미에 대해 심(心)을 구성하는 리(理)와 기(氣) 속에서 근원적으로 심이 곧 리임을 밝히는 것이라 해명하였다. 이진상은 자신의 학설과 왕양명의 심즉리설을 엄격히 구분하였으며, 자신이 성리학의 입장에 서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내용]

이진상은 「심즉리설」에서 심을 돌[石]과 옥(玉)이 섞여 있는 옥의 원석에 비유하면서, 왕양명의 심즉리설은 옥에 섞여 있는 돌까지 옥이라 하는 것으로 본체와 작용을 혼동하여 기에 속하는 심의 작용까지라 주장하는 것이니 실은 심즉기설(心卽氣說)이요, 자신의 심즉리설은 원석 속의 옥만을 가리켜 옥이라 하듯이 심의 본체만을 가리켜 리라 하는 것이니 진정한 의미에서 심즉리설이 되는 것이라 하여, 자신의 학설을 왕양명의 심즉리설과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

또한 왕양명이 기를 리와 오인하였기 때문에 심즉리(心卽理)가 바로 심즉기(心卽氣)임과, 본심의 올바름은 리에 있을 뿐 기에 있지 않음으로 공자의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음[從心所欲不踰矩]’과 맹자의 ‘양심(養心)’과, 정자의 ‘마음과 성이 모두 리[心性一理]’라는 말과, 주자의 ‘마음이 태극[心爲太極]’이라는 말과, ‘주재하는 것은 리[主宰卽理]’라는 말이 모두 리를 가지고 마음을 말한 것이니 ‘심즉리’ 세 글자가 요결임을 밝혔다.

이진상의 성리학에 대한 해석은 영남학파의 정통적인 견해와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이진상의 사후 영남학파 사이에 이를 둘러싸고 상당한 논란과 학문적 토론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진상심즉리설은 당대의 성리학계에 중요한 쟁점을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1846~1919],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1847~1916], 중재(重齋) 김황(金榥)[1896~1978] 등 이진상의 문하에 계승되어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특징적 학풍으로 전승되었다. 그들은 이진상심즉리설에 입각하여 다른 학설을 비판하고 그들의 학설을 옹호하는 논변을 활발히 펼쳤다. 특히 곽종석·이승희심즉리설의 타당성 여부를 둘러싸고 이만인(李晩寅)·이재기(李載基)와 맞서 1886년(고종 23)부터 4년에 걸쳐 논쟁을 벌인 것은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이진상의 성리학에 대한 해석은 영남학파의 정통적인 견해와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이진상의 사후 영남학파 사이에 이를 둘러싸고 상당한 논란과 학문적 토론이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한주문집』 간행 후, 도산서원에서 『한주문집』의 내용 중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주장에 반하는 내용이 있다고 하며 문집을 반송하는 일도 있었다.

이진상심즉리설은 당대의 성리학계에 중요한 쟁점을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곽종석, 이승희, 김황 등 이진상의의 문하에 계승되어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특징적 학풍으로 전승되었으며, 이후 전국의 유림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919년에 일어난 유림단 파리 장서 사건이진상의 제자인 곽종석과 장석영 외에 이승희의 제자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1879~1962] 등이 주동 인물이 되었던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며, 일제 강점기에 한주학파의 학자들이 의병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실 역시 주목할 만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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