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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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嶺南萬人疏 |
영어공식명칭 | Yeongnam Maninso |
이칭/별칭 | 신사 척사 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1881년 성주를 비롯한 영남 지역의 유생들이 개화 정책에 반대하여 올린 집단적 상소.
[개설]
영남 만인소(嶺南萬人疏)는 1881년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 및 미국과의 조약 체결에 반대하며 올린 이만손(李晩孫)을 중심으로 한 영남 지역 유생들의 상소이다. 개화에 반대하는 위정척사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계기가 된 사건으로 성주 지역의 유생들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역사적 배경]
1873년 고종의 친정(親政)과 더불어 추진된 개화 정책은 결국 개화파의 주도하에 일본과의 개항으로 귀결되었다. 대원군 집권기에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를 거치면서 강화된 ‘척화(斥和)’의 분위기는 개항으로 인해 더욱 고조되었다. 이런 척화 분위기는 곧 집단적인 상소 운동으로 이어졌다. 소위 ‘척사소’(斥邪疏)가 그것이다.
영남 유림이 적극적이고 집단적인 척사 운동을 전개하게 된 계기는 18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가져온 청국공사관 참사관 황준헌의 『조선책략』이었다. 1880년 11월 경상북도 안동·영주 등지에서 『조선책략』을 비판하는 척사 통문(斥邪通文)이 도산서원과 영주향교에서 발송되며 영남 만인소가 점화된 것이었다. 이른바 신사 척사 운동(辛巳斥邪運動)이었다.
[경과]
1880년 11월 26일 안동향교에서 경상좌도의 유생 800여 명이 참석하여 도회를 열고 이만손을 소수(疏首)로 추대하였다. 경상우도에서는 1880년 12월 5일 개령향교(開寧鄕校)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진상(李震相)은 성주의 송천(松川) 모임에서 향리 내에 사학(邪學)을 배척하는 서신을 발송했고, 나아가 경상도 전역으로 통문을 발송하였다. 이어서 황난선(黃蘭善)·이진상·송인호(宋寅濩) 등이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 있는 신광사(神光寺), 즉 선석사(禪石寺)에 모여 척사 통문을 발송하였다. 1880년 12월 15일 이진상은 개령향교에서 열린 도회에서 도청이 되어 소청의 일을 주관하였다.
경상좌·우도에서 모임을 가진 유생들은 만인소의 도회소를 상주의 산양(山陽)[현 문경 산양]으로 정하였다. 이진상은 동생 이운상(李雲相)과 족제 이직상(李稷相)을 소행(疏行)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아들 이승희(李承熙)를 산양도회에 보내 자신의 척사에 관한 의견을 피력한 서신 「저산양도회소(抵山陽都會所)」를 전달하도록 하였다. 1월 29일 열린 산양도회에서는 영남의 대표적인 학자가 지은 수십 통의 소초(疏草)가 제출되었는데, 그중에서 강진규(姜晉奎)의 척사소가 채택되었다. 성주에서는 이승희를 비롯해 송인호·이종기(李種杞) 등이 각기 척사소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성주 지역의 유생들은 성주를 비롯한 영남우도의 여론을 주도하며 영남 만인소에 참여하였다. 『위정척사소초(衛正斥邪疏草)』의 「파록(爬錄)」에 의하면, 성주 지역의 참가 유생들은 모두 8명으로 장의(掌議) 이운상, 소색(䟽色) 이직상·장조헌(張祖憲)·정대화(鄭大和), 제소(製䟽) 송인호, 사소(寫䟽) 송제익(宋濟翼)·정천화(鄭天和), 배소(陪䟽) 이진화(李震和) 등이었다. 그 외에도 성주 지역에서는 「파록」에는 등재되지 않았지만, 이진상과 아들 이승희, 성주 다산(茶山) 출신의 유생 이종기 등이 참여하였다.
이진상은 아들 이승희 편으로 산양도회에 보낸 편지 「저산양도회소」에서 “척사(斥邪)는 시대를 구하는 급무(急務)”라고 전제하고, 만인소에서 주장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충고하였다. 이승희는 아버지 이진상의 「저산양도회소」에서 거론하고 강조한 점을 기초로 「청척양사소(請斥洋邪疏)」를 작성하였다. 이승희는 「청척양사소」에서 천주교의 전파와 서양의 침범을 거론하며 “요망(妖妄)한 적(賊)의 사악(邪惡)한 설(說)을 물리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대저 서양의 무리는 그 정신과 명맥이 단지 공리(功利)의 말교(末巧)”이며, 저들의 천주교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무너뜨리는 흉적이므로 천리(天理)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결과]
경상북도 성주 지역 유생들은 성주를 비롯한 영남우도의 여론을 주도하며 영남 만인소에 참여하였다.
[의의와 평가]
1881년 성주 유생들의 영남 만인소 참여는 응와(凝窩) 이원조의 위정척사적 전통이 한주(寒洲) 이진상과 그의 아들 이승희를 통해 현실 대응 논리로 계승된 것이었다. 영남 만인소에 참여한 성주 유생들은 척사소를 통해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비판하여 본격적인 반외세 투쟁의 선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