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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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憲昌-亂 |
영어공식명칭 | Gim Heonchang's Rebelli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이동주 |
발생|시작 시기/일시 | 822년 3월 - 김헌창의 난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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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822년 - 김헌창의 난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성산군 - 경상북도 성주군 |
종결 장소 | 성산군 - 경상북도 성주군 |
성격 | 반란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김헌창|김주원|원성왕|헌덕왕|김수종|장웅|위공|제능|최웅 |
[정의]
822년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
[개설]
김헌창의 난은 822년(헌덕왕 14) 3월 통일 신라의 웅천주(熊川州)[지금의 충청남도 공주 지역] 도독 김헌창(金憲昌)이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의 왕위 계승 실패와 자신의 중앙 정계 소원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이다. 9주 5소경 가운데 5주 3소경이 호응한 신라 최대의 반란이었고, 김헌창은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으로 정하고 주변 지역을 규합하였다. 그러나 토벌군이 반란군을 진압하고 급기야 김헌창이 자결함으로써 한 달이 못되어 반란은 평정되었고, 반란의 와중에 성주가 지방의 요충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 배경]
선덕왕(宣德王) 사후 상재(上宰) 김주원이 왕위 계승 후계자로 낙점되었다가, 김경신(金敬信)에게 왕위가 돌아가게 되자 김헌창이 크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김헌창은 중앙에서 시중으로 실력을 행사하다가, 애장왕(哀莊王) 사후 시중직에서 밀려나 무진주(武珍州)[현 전라남도 광주] 도독, 청주(菁州)[현 경상남도 진주] 도독, 웅천주 도독 등 지방 외직으로 전보되었다. 이에 헌덕왕(憲德王) 일파의 견제를 받던 김헌창이 웅천주를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김헌창은 원성왕계 왕실의 정당성에 대한 부정을 반란의 명분으로 내세워 거사를 합리화하며, 과거 김주원을 지지했던 귀족 세력들을 중심으로 다시 지지를 호소하였다.
[경과]
780년 4월 일어난 내란의 와중에 36대 혜공왕(惠恭王)이 피살되며 신라 중대가 막을 내리고, 상대등(上大等)인 김양상(金良相)이 37대 선덕왕으로 즉위하며 신라 하대의 서막이 올랐다. 선덕왕이 재위 6년 만에 후사 없이 서거하자 화백회의에서 상재 김주원을 차기 왕위 후계자로 정하였다.
차재(次宰) 김경신이 아찬 여삼의 꿈풀이를 바탕으로 북천신에게 몰래 제사를 지내었고, 때마침 큰 비가 내려 북천의 물이 불어나게 되었다. 서울 북쪽 20리[약 8㎞]에 살던 김주원은 북천을 건너지 못했고, 이 틈을 이용하여 김경신이 38대 원성왕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김주원은 명주(溟州)[지금의 강원도 강릉]로 퇴거하였다. 큰아들 김종기와 손자 장여는 원성왕계와 친밀한 관계 속에서 연이어 시중을 역임하였다. 반면 작은아들 김헌창은 원성왕계와 반목하며 불만을 품게 되었다.
813년 정월 신라 조정은 회유책으로 김헌창을 무진주 도독에 임명했고, 이듬해 8월에는 집사부 시중에 제수하였다. 하지만 816년(헌덕왕 8) 정월에는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청주 도독에 전보했고, 821년(헌덕왕 13) 4월에 웅천주 도독으로 전임하였다. 김헌창이 지방관으로 재임하던 시절은 자연재해와 큰 기근으로 백성들의 삶이 궁핍하던 때였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당나라로 들어간 굶주린 백성들이 170명이나 되었고, 자식을 팔아 생활하는 자도 있었다. 사방에서 벌떼처럼 일어난 초적들은 지방관들의 골칫거리였다. 중앙의 요직은 원성왕의 손자들이 독식하고 있었고, 자신을 견제해 오던 김수종이 헌덕왕의 후계자로 확정되자 김헌창의 분노는 마침내 극에 달하게 되었다.
연이은 자연재해와 중앙에 대한 반감에 편승하여 지방민을 규합하여 반역의 기치를 올렸다.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명분 삼아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 원년이라 하였다. 당시 김헌창이 웅천주 도독이었으므로 공산성(公山城)에서 국왕을 자칭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헌창은 반란 당시 자신의 관할이던 웅천주를 비롯한 무진주, 청주, 완산주(完山州)[현 전라북도 전주], 사벌주(沙伐州)[현 경상북도 상주] 등의 4도독과 국원경(國原京)[현 충청북도 충주]·서원경(西原京)[현 청주]·금관경(金官京)[현 경상남도 김해]의 사신(仕臣) 및 여러 군현을 협박하여 자기 관할에 두었다.
5주 3소경이 호응한 신라 최대의 반란이었으나,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여 신라를 타도하려던 김헌창의 꿈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거사 직후 청주 도독 향영(向榮)은 추화군으로 달아났고, 한산주, 우두주, 삽량주(揷良州)[경상남도 양산], 패강진(浿江鎭)[황해도 평산], 북원경(北原京)은 군사를 내어 반군에 대비하였다. 또한 완산주 장사(長史) 최웅과 주조(州助) 아찬 정련의 아들 영충은 조정에 반란 사실을 고하였다.
[결과]
신라 조정에서는 차원(差員) 장수 여덟명으로 하여금 왕도의 여덟 방면을 지키게 한 뒤 군대를 출동시켰다. 일길찬(一吉飡) 장웅(張雄)을 선발로 하여 잡찬(迊飡) 위공(衛恭), 파진찬(波珍飡) 제능(悌凌)이 그 뒤를 잇고, 이찬(伊飡) 균정(均貞), 잡찬 웅원(雄元), 대아찬(大阿飡) 우징(祐徵) 등은 삼군을 통솔하며 정벌을 떠났다. 김헌창도 주요 길목에서 관군을 기다렸다가, 김균정의 관군과 성산(星山)에서 싸워 패하였다. 성산은 현재의 경상북도 성주군 일대로 추정된다.
이 사례를 통해 당시 강주의 성주군이 김헌창의 반란군 수중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정부군은 각지에서 반란군을 섬멸하고 종국에는 진원지인 웅천주 주치로 진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김헌창이 자결하자 종자가 목을 잘라 머리와 몸을 각각 묻었다. 성이 함락되자 고총에 숨긴 시체를 찾아내어 몸을 다시 베고, 종족(宗族)과 도당(徒黨)이 연좌되어 목숨을 잃은 이가 239명에 달하였다.
822년(헌덕왕 14) 청주 태수의 청사 남쪽 연못에 기이한 새가 발견된 바 있었고, 크기 3일 만에 죽었는데, 김헌창이 패망할 징조로 해석하였다. 이는 집사부 시중에서 청주 도독으로 출보된 김헌창의 관력을 빗댄 상징적인 설화로 풀이된다. 신라 하대에 성주군은 김헌창 반란군의 수중에 있던 지역이었고, 김균정의 정부군이 이를 격파하였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성주는 신라 왕경으로 진입하는 주요 길목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신라 하대 정계의 헤게모니(Hegemonie) 세력은 원성왕의 후손들이 주축이었으나, 김헌창의 난 이후로 무열왕계는 중앙 정계의 주도적인 위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835년에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고달산(高達山)[지금의 경기도 여주] 산적 수신과 함께 재차 반란을 일으켰다가 바로 진압되면서 무열왕계는 중앙 정계의 주도권을 상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