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2969 |
---|---|
영어의미역 | Onui Pagodas across the Nakdong River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집필자 | 이영진 |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오누이탑 이야기]
‘구미 선산’이라고 해야 하나, ‘선산 구미’라고 해야 하나. 예전에는 선산의 귀퉁이에 붙은 구미가 첨단공업단지 덕에 오히려 선산을 거느리다 보니 이제는 ‘구미 선산’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 옛날 선산은 영남사림의 본산이요, 영남인재의 반을 배출한 인재의 땅이었다. 그 옛날 삼국시대 때는 아도라고도 하고 묵호자라고도 하는 고구려의 스님이 신라 땅에 내려와 불교의 씨앗을 뿌린 텃밭이기도 하였으니 선산 땅에 내린 문화의 뿌리는 가지 수도 많고 한없이 깊고 튼실하다.
신라불교의 텃밭 선산에 뿌려진 많은 불교 씨앗 중에 아직도 꽃피우지 못한 묵은 싹 하나가 있다. 그것이 선산읍 죽장동 오층석탑과 해평면 낙산동 삼층석탑에 얽힌 오누이탑 전설이다. 탑들이야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진 터이지만 탑의 생성에 얽힌 믿기지 않는 설화는 궁금해 안달하는 이 별로 없이 촌로들의 입으로만 그저 바람처럼 떠돌아다닌다.
[천년을 떨어져 산 오누이탑]
보통 오누이탑이나 쌍둥이탑 이야기가 얽혀 있는 탑은 두 개의 탑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으면서 닮았거나 다정한 모습으로 비춰진다. 저 유명한 계룡산 청량사지 오누이탑은 닮은 모습으로 다정하게 나란히 붙어 있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동사 쌍둥이탑도 떨어져 외로울세라 짝이 되어 붙어 있다. 그런데 선산에 있는 오누이탑은 넓디넓은 낙동강과 발길 가로막는 산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서로 닮은 모습으로 서 있다. 두 탑을 오가려면 직선거리로 20리 쯤 되고 승용차로 30분은 족히 가야 하니 어느 쪽에서든지 육안으로 확인조차 되지 않는 곳에 있다. 여느 탑처럼 가까이 있으면 서로 이야기도 나누고 비바람막이라도 되어 주련만 떨어져 외로이 맨살을 드러내 놓고 있다. 차라리 오누이라고 알려지지만 않았어도 보는 이들이 측은해 하지는 않을 터인데...
낙산동 삼층석탑은 구미시 해평면 낙산3리에 있다. 선산읍에서 상주로 향하다가 일선교를 건너 해평으로 내려가는 국도 25호선을 따라 2.2㎞를 가면 낙산동 마을 안길을 따라 오르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1.2㎞로를 더 가면 너른 골짜기가 삼층석탑을 품에 안고 있다. 탑을 지키는 절집 하나 없이 풀밭에 우두커니 서 있는 외톨이 탑이다.
죽장동 오층석탑이 얻어낸 주소는 구미시 선산읍 죽장리 505-2번지[죽장2길 90]이다. 이곳을 찾아가려면 선산읍에서 상주 방면으로 가는 지방도 903호선을 따라 1.9㎞ 가다보면 도로변 오른쪽에 탑이 있다는 이정표 2개가 나온다. 하나는 ‘죽장사지 오층석탑’이라는 표지이고 다른 하나는 ‘황정사 입구’라는 표지이다. 이정표가 가르치는 대로 0.9㎞ 따라 오르면 죽장리가 나오고 마을 안길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오층석탑이 아래를 굽어보며 찾는 이를 반긴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선산 IC에서는 더욱 찾기 쉽다. IC를 빠져 나와 선산읍 방향으로 조금 내려오면 앞에서 이야기한 이정표가 나온다.
막상 절집에 다다르면 탑 주위에는 새로 지은 말쑥한 절집이 두어 채 있지만 ‘죽장사’니 ‘죽장사지’니 하는 글씨는 보이지 않고 ‘황정사’라는 절 이름만 이리저리 세워져 있다. 옛날 한 때는 ‘법륜사’라는 이름을 가졌기에 탑을 지키는 비구니 견진스님에게 물었더니 절 이름이 좋지 않다고 하여 다시 개명하였단다. 그런데 호적에 올라 있는 이름은 죽장사지 오층석탑인지라 기억하고 오는 사람들을 헛갈리게 한다.
내친김에 비구니 스님에게 ‘이 탑이 유명하지요?’라고 물으니 탑을 지키며 들은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오층탑은 선산 땅의 지기를 누르고 모으기 위해 세운 비보탑이란다. 그래서 나라에 변란이 올 때면 탑이 ‘윙윙’ 큰 소리로 운단다. 옛날 일제시대 때 일본 도굴꾼들이 탑 안에 묻어 놓은 보물을 꺼내 가려고 사다리를 놓고 탑을 오를 때 갑자기 이무기가 탑 꼭대기에 앉아 괴성을 지르자 하늘에서 번개와 천둥이 쳐 도굴꾼을 쫓았단다. 그래서 주변마을 사람들은 이 탑을 보물 다루듯이 지켜왔다고 전해 주었다. 20여 년간 탑을 지키면서 마을 노인들에게 들은 이야기일 뿐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니 흔히 탑에 붙어 다니는 재미있는 이야기일 뿐이나, 그래도 이런 재미에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다시 비구니 스님에게 묻기를 ‘아니 이 탑이 오누이탑이라면서요? 하자 입담 좋은 비구니 스님이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오누이탑에 얽힌 사연]
죽장동 오층석탑과 낙산동 삼층석탑에 얽힌 오누이탑 이야기는 저 멀리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탑의 조성연대가 신라시대이니 얽힌 이야기의 생산시기도 그 시대로 잡아야 마땅하겠지만 참 오래된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다음이 오누이탑 이야기의 흐름이다.
옛날 신라시대에 선산의 옛 이름인 일선 죽장동에 아주 다정한 오누이가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오누이는 ‘탑 쌓아보자’고 하면서 내기를 하였다. 누가 먼저 쌓는가, 그리고 누가 더 크고 아름다운 탑을 쌓는지 솜씨 겨루기를 하였다. 그래서 누이는 지금 죽장동 오층석탑이 있는 자리에서 탑을 쌓고 오라버니는 강 건너 낙산동 삼층석탑이 있는 자리에서 탑을 쌓기로 하고 한 날 한시에 탑 쌓기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나이 많고 힘센 오라버니보다도 누이가 더 빨리 탑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것도 더 크고 아름답게 쌓는 것이 아닌가. 이를 구경하고 있던 오누이의 어머니는 처음부터 아들이 먼저 쌓아 이기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는데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오누이의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 아들이 이기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 그래서 딸의 탑 쌓는 시간을 빼앗기 위해 말 1000필을 한양에 몰아다 주고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딸은 어머니의 심부름이니 어길 수 없어서 재빠른 걸음으로 한양을 다녀왔다. 한양에 갔다 온 연후에도 여전히 누이의 탑 쌓는 속도가 더 빠르자 다시 꾀를 내, 딸에게 팥죽을 끓여주면서 배고프니 빨리 먹고 탑을 쌓으라고 시켰다. 어머니는 뜨거운 팥죽을 먹다보면 시간을 빼앗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허사였다. 끝내 누이가 지금의 오층석탑을 먼저 쌓고 말았다. 아들을 중히 여긴 어머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누이가 먼저 오층석탑을 쌓는 바람에 오라버니는 탑 쌓기를 그만두어 삼층밖에 안 되는 지금의 삼층석탑이 되었다는 사연이다.
입으로 떠도는 이런 이야기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다. 죽장동 오층석탑과 가까운 선산 무을에 있는 옛 절터에도 오누이탑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다.
오누이탑이나 쌍둥이탑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나라 곳곳에 전승되고 있는 구전 설화이다. 절집의 돌탑이 하나만 있는 경우도 있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돌탑이 두 개인 경우가 많고 워낙 빼 닮았을 뿐 아니라 보기에 따라서는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 다정해 보여 남매탑이니 오누이탑이니 쌍둥이 탑이니 하는 말들을 남긴 성 싶다. 오누이탑에 대한 대표적인 이야기는 계룡산 청량사지칠층석탑에 얽혀 있고, 쌍둥이탑 이야기는 화엄사 동서 오층석탑이 대표적이다.
선산 오누이탑 이야기와 계룡산 오누이탑 이야기는 생성 모티브가 판이하게 다르다. 선산 오누이탑은 죽장동 오층석탑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라면 계룡산 오누이탑은 ‘은혜갚음’의 의미를 되새기는 이야기이다. 말하자면 죽장동 오층석탑은 누가 빨리, 그리고 아름답게 쌓는가를 겨루어 누이가 쌓은 죽장동 오층석탑이 이른 시간에, 그것도 아름답게 완성되었다는 의미를 전달하기위한 이야기이다. 이에 비해 계룡산 청량사지칠층석탑에 얽힌 오누이탑 이야기는 호랑이가 자기의 생명을 구해준 승려를 위하여 처녀를 데려와 은혜를 갚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승려의 극진한 간호로 목숨을 구한 처녀가 의남매를 맺은 뒤 은혜를 갚기 위해 불도에 정진한 것을 기려 후에 탑 두 개를 세웠다는 ‘보은’이야기가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선산 땅 오누이탑 이야기는 얽힘 자체가 특이하다. 분명 신라시대에 만든 탑에서 생산된 이야기인데도 아들을 중시하는 남아선호사상이 진하게 배어 조선시대 가족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데에서 재미를 더한다. 그러나 막상 아들을 선호하여 그렇게 물심양면으로 응원한 오라버니는 내기에서 지고, 온갖 방해공작에도 꿋꿋하게 제 할일을 다한 누이가 이기도록 얽어매 놓은 이야기의 진정한 의미는 아리송하기 짝이 없다.
[너무 닮아서 오누이탑]
죽장동 오층석탑과 낙산동 삼층석탑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오누이처럼 다정함도 묻어나지 않는데도 왜 오누이탑이라는 이름을 얻었을까. 오누이란 서로 닮고 다정함을 표현할 때 대명사처럼 사용되는 말이 아닌가. 그래서 흔히 다정한 아버지와 딸이나, 다정한 부부를 ‘오누이 같다’라고 말한다. 여기 죽장동 오층석탑과 낙산동 삼층석탑은 서로 닮았을지언정 다정함이란 찾을 수 없다. 쳐다볼 수 있어야 정이 들지 쳐다 볼 수조차 없이 떨어져 있으니 정이 들려해도 들 수 없게 되어 있다. 처음부터 떨어져 있었으니 이들은 이미 태생부터 ‘이산가족’이었다. 그래서 다정함보다는 서로 닮아서 오누이탑이라 이름 지은 것이 아닐까? 두 탑을 눈여겨보는 답사꾼들은 두 탑이 층수가 다르고 풍기는 격조가 다를 뿐 형식이 너무 닮아 ‘부자지간’ ‘형제지간’으로 표현하기도 하니, 닮은꼴을 보는 눈은 꼭 같은 모양이다.
두 탑이 얼마나 닮았는지 살펴보자. 죽장동 오층석탑은 탑의 높이가 10m나 되는 높은 탑이다. 탑 꼭대기를 보면 노반까지만 남아 있으니 본래의 모습은 더욱 높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오층석탑 중에서는 가장 높은 탑이다. 그래서 눈을 쳐들어 우러러보아야할 정도이다. 탑의 양식을 비교해 보면 의성군 금성면 탑리에 있는 오층석탑이나 같은 땅에 있는 빙산사터 오층석탑과 비슷한 모전석탑이다. 바닥에 까는 전처럼 널찍하게 다듬은 돌로 쌓아 놓은 탑이다. 수백 개의 다듬은 돌을 짜 맞추어 흐트러짐 없이 쌓아 올라갔다. 지붕돌마다 아랫면뿐만 아니라 윗면에도 계단식 층급을 두어 층계지움이 가지런하니 아름답다. 대부분의 돌탑 몸돌에서 볼 수 있는 모서리에 새겨진 모서리기둥을 이 탑에서는 볼 수 없고 1층 몸돌에는 탑의 격에 맞는 큼지막한 감실을 만들었다. 감실 입구를 보면 여닫는 문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크기가 가로 66㎝에 세로가 107㎝나 된다. 그 안은 사방을 정으로 투박하게 파낸 돌방이 넓고 높아 큼지막한 불상이 편안히 쉴 수 있도록 하였다. 아마 감실안의 불상은 높은 죽장동 언덕에 앉아 멀리 낭산 도리사를 굽어보면서 앞선 시대에 신라 땅에 불교의 뿌리를 심은 선각자 아도화상을 생각하였으리라. 지금 감실에는 예전에 있었던 불상은 없어지고 죽장사 비구니 스님이 최근에 마련한 자그마한 불상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이 탑은 기단이 특이하다. 모전석탑은 모두 기단이 단층이므로 이 탑도 단층이라는 주장과, 이 탑은 다른 모전석탑과는 달리 2층 기단이라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 터다. 단층기단임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지대석이라고 주장하는 하층기단에는 모서리 기둥이나 중간기둥이 보이지 않는다. 그냥 큼지막한 전돌을 짜 맞추어 놓았다. 이와는 달리 상층기단에는 각 면에 세 개의 중간기둥과 모서리기둥을 두었는데, 새긴 것이 아니라 다른 돌로 짜 맞추어 세웠다.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탑을 둘러보라. 너무나 안정되어 있으면서 기품이 넘쳐 아침이슬 머금고 꽃망울 터뜨리는 한 떨기 산나리를 연상케 한다. 누이가 쌓았다는 전설을 떠올리며 여성스러움을 찾으려 눈길을 더듬어도 여성스러움은 보이지 않고 딱딱하지 않으면서 장중한 멋이 중후한 남성을 닮았다.
오층석탑을 살핀 뒤 강 건너 오라버니가 쌓았다는 낙산동 삼층석탑을 보면 언뜻 ‘키 작은 쌍둥이 동생’을 만나는 듯 너무나 닮아 있다. 돌들을 짜 맞추어 쌓아올린 모습이나 탑에서 풍기는 멋이 오층석탑과 그렇게 닮았을 수가 없다. 1층 몸돌에 감실을 마련한 수법이나 전탑을 본 따 지붕돌에 층급받침을 돌린 모습이 닮았다. 몸돌에 모서리기둥을 새기지 않고 짜 맞춘 모습이 같은 석공이 본을 떠서 만든 듯 아주 비슷하다.
일란성 쌍둥이탑이 아니고 오누이탑이니 서로 다른 점도 있다. 5층이 아니라 3층 밖에 안 되는 탑의 규모가 주는 장중함에 차이가 난다. 만든 수법으로 보아 시대를 달리하는 기단의 모습도 판이하게 다르다. 삼층석탑의 기단은 시대가 상당히 올라가 신라 초기의 수법을 가지고 있다. 하층기단의 받침기둥이 셋인데 비해 상층기단의 그것은 둘인 점이 죽장동 오층석탑보다 이른 수법이다. 규모가 작다보니 죽장동 오층석탑에 비해 돌탑의 석재들이 자잘하다. 다듬은 전돌을 짜 맞춘 모습도 다소 흐트러져 보인다. 글쎄 오라버니가 너무 급했던 것일까. 아니면 오라버니의 솜씨가 그만큼밖에 되지 않았던 것일까.
[이제 묵은 싹을 틔울 때]
두 탑을 비교해 보면 만든 시대를 달리하니 오누이가 함께 쌓았다는 이야기를 무색케 한다. 흔히 전설의 이런 점이 우리들에게 웃음을 자아내게 하지만 전문가의 눈에 너무 쉽게 들통 날 이야기가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인양 돌아다닐 때는 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전설대로 믿는다면 오라버니의 탑 쌓는 솜씨가 형편없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라버니가 아닌 누이가 쌓은 탑이 표 나게 훌륭한 탑이 되었을까? 오라버니로 둔갑하는 설정도 가능한데 말이다. 우리 모두가 이런 의문을 던져 놓고 답하다 보면 선산 땅에 뿌리를 둔 오누이탑이 오늘날과 같은 척박한 ‘세상의 밭’에 튼튼한 싹을 틔울 수 있으리라.
묵은 싹을 틔우기 위해 풀어야 할 또 하나의 숙제가 남아 있다. 떨어진 채 외로움에 떨고 있는 오층석탑과 삼층석탑을 만나게 해주는 일은 어렵디 어려운 일이니 엄두내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있는 채로 두 탑을 지켜 줄 수 있는 ‘뼈대있는’ 절집을 찾아주는 일은 어렵지 않을 듯하다.
옛날에 분명 두 탑을 지켜 준 절집이 있었으리라. 제대로 된 절 집을 장만해 주는 것이 오누이탑에 또 다른 전설의 옷을 입힐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가 아닐까. 죽장동 오층석탑은 옛날에 죽장사라는 절에 있던 탑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 뿐이 아니다. 탑 주변 수만 평 넓은 땅에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큰 절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오층석탑이나 주변에 흩어져 있는 유물 쪼가리들이 만들어진 시대가 통일신라시대로 판정났으니 신라시대에 이미 절터로 자리 잡았던 모양이다. 지금까지 발굴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흩어져 있던 옛 모습의 조각들을 주워모아 탑 주변에 보기 좋으라고 진열해 놓고 있을 뿐이다. 하잘것없는 돌 나부랭이도 모양이 이상하다 싶으면 고이 간직하는 세상에 천년을 숨 쉬어 온 유물들이 한낮 조경거리로 둔갑하여 비바람 맞고 있을 일인가. 이미 그 땅에 논밭이 개간되고 새로 절집을 짓는다고 이리저리 흩트려 놓았지만 발굴 한 번 거창하게 벌여 옛 모습 찾는 일에 힘 쏟을 때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전설시대에 누이가 푸대접 받으면서 쌓은 오층석탑을 지킨 그 옛날 절집이 아니더라도 그 터에 뿌리를 둔 새 울이 만들어 졌으면 좋겠다. 기왕이면 탑을 지켰던 절터의 호적 이름도 제대로 지켜지고 불려 졌으면 좋겠다. 지금 오층석탑 옆에 최근 지은 절집이 옛 절터의 일부에 자리 잡고 있지만 옛 이름을 싫어하는 듯 자꾸만 이름을 바꾸어 버리니 안타까운 일이다.
강 건너 낙산동에 있는 ‘오라버니탑’은 누이에게 진 탓인지 모르지만 누이탑 보다 한 계급 낮은 보물이라는 계급장을 달고 비바람 피할 암자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서 풀벌레에 물어뜯기면서 신음하고 있다. 주변은 온통 논밭이다. 이제 옛 절터가 있었다 한들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새 땅’이 되어 있으니 위로해 줄 방법이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