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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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龜尾洛山里三層石塔 |
영어의미역 | Three-Story Stone Pagoda at Naksan-ri of Seonsan |
이칭/별칭 | 선산 낙산동 삼층석탑,낙산리 모전 삼층석탑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탑과 부도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837-1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이희돈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8년 12월 19일 - 구미 낙산리 삼층석탑 보물 제469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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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구미 낙산리 삼층석탑 보물 재지정 |
성격 | 석탑 |
양식 | 삼층석탑 |
건립시기/연도 | 통일신라(8세기경) |
재질 | 석재 |
높이 | 715㎝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837-1 |
소유자 | 국유 |
문화재 지정 번호 | 보물 |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에 있는 통일신라 때의 삼층석탑.
[개설]
구미 낙산리 삼층석탑에 관하여는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해평면 낙산동 전체 높이 4간반 기석 2간반각의 삼층석탑 조각이 정교 완전함[海平面 洛山洞 全高 四間半 基石二間半角ノ 三重石塔ニ ヅテ彫刻 精巧 完全ナリ]”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일대의 경작지에서 연꽃 무늬가 새겨진 막새기와를 비롯하여 많은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 등이 발견되어 이 부근이 절터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탑은 약간의 손상되어 있으나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인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1968년 12월 19일 보물 제46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건립경위]
선산은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파되었을 때와 인연이 있는 곳으로 거대한 석탑이 많이 남아 있다. 구미 낙산리 삼층석탑은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국보 제130호]과 거의 유사한 모전탑 계열로 이중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위치]
해평면 낙산리에 위치하며 대구-상주간 국도에서 약 2㎞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다. 일선교삼거리에서 해평 쪽으로 약 3㎞ 정도 되는 낙산리 마을 동남방의 논 가운데에 건립되어 있다.
[형태]
전체 높이는 715㎝이며, 이중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구성하였는데, 각 층 지붕돌[옥개석(屋蓋石)] 상면의 층단 형식 등에서 전탑(塼塔)의 형태를 본뜬 모전석탑(模塼石塔) 계열에 속하는 특이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탑신부의 윗부분에 장식되었던 상륜부는 노반(露盤)과 복발만 남아 있고, 그 위의 부재는 모두 없어졌다. 지대석 위의 하층 기단은 여덟 개의 돌로 구성되었는데, 양 우주(兩隅柱)가 있고 그 앞면에 삼주(三柱)의 탱주(撐柱)가 있다.
상층 갑석은 네 개의 돌로 결구되었는데, 탑신 바로 밑에도 장대석을 치석(治石)한 돌 두 개가 포개져 있다. 탑신부의 1층 몸돌에는 남쪽에 불상을 모시기 위한 감실이 마련되어 있는데, 현재는 감실 입구 내부의 양측 상하에 원주(圓柱)만이 남아 있다. 지붕돌은 돌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붕이 통식이 아니고 아래 받침과 지붕 추녀, 윗면 층단 모두 전탑의 양식을 모방하고 있다.
초층 지붕돌은 받침이 5단이고 도합 13개로 구성되어 있다. 2층 탑신은 3개씩 6개로 결구되었는데, 지붕돌은 받침이 5단이고 부분별로 재석(材石)이 6개이며 층단부는 전탑 양식을 모방하여 십여 개의 돌로 구성되었다.
3층의 탑신은 4개의 돌로 구성되었고, 지붕은 5개로 된 받침부에 4단의 지붕 받침이 각출되었으며, 정상에는 하나의 돌로 된 노반이 놓여 있고, 그 중앙에는 찰주공(擦柱孔)이 관통되어 3층 지붕돌 중심까지 구멍이 뚫려 있다. 이 탑의 아래층 기단에 가운데 기둥을 3개나 새긴 것은 초기적인 양식이라 할 수 있는데, 몸돌[옥신석]과 지붕돌의 구성 방법은 다소 시대적으로 뒤떨어진 면을 보여준다.
[현황]
석탑재의 치석 수법이나 기단부의 구조 및 몸돌, 지붕돌의 양식 수법으로 보아 조성 연대는 8세기경으로 추정되며, 현재 석탑 이외에 아무런 유적, 유물도 없으나, 주변 경작지에서 연화문 막새기와를 비롯하여 많은 기와편과 토기편을 수습할 수 있어 고대의 사찰지임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당시의 사찰은 폐허가 되어 자세히 알 길이 없다. 다만 약식 조사에 따르면 비슷한 규모의 탑이 하나 더 있는 양식, 즉 탑 두 개와 법당 하나를 갖춘 일금당이탑(一金堂二塔) 양식의 사찰로 추정된다. 또한 현재는 탑의 기단이 일부 손상을 입었으나 석재의 구성이 정연하고 당당하며 장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석탑이 모전석탑 계통에 속한다는 것은 지붕돌 윗면의 층단으로 짐작이 되는데,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과 함께 모전석탑의 분포를 고찰하는 데 중요한 석탑이다.
석탑 자체가 거대한 것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각부를 많은 부재로 구성하고, 기단부의 탱주 수가 많은 것은 건립 연대를 고증하는 데 참고가 될 것이다. 돌의 구성에서도 규율성을 잃지 않고 위풍당당하고 장중한 것을 볼 때, 이 석탑의 건립 시기를 통일신라 초기로 보는 것이 적당하겠다. 최근 석탑 서북쪽 5m 떨어진 경작지에서 가로 5m, 세로 3m의 건물지가 조사되었고, 건물과 탑에 쓰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석재편이 한곳에 모아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