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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2959
영어의미역 Andong Yangban Village Settled in Ilseonri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영진

[구미 지도를 두 번째 바꾸다]

선산이 양반 고을은 양반 고을인 모양이다. 온전히 체신 지키면서 살아갈 마땅한 곳 없어 삶터 찾아 헤매던 안동 양반들이 선산 땅을 알아보고 영주지로 자리 잡았으니 말이다. 안동 양반들이 찾아든 양반 고을 선산 땅 한편에서는 공업단지를 만든다고 붙박이로 살던 양반마을 사람들을 통째로 쫓아내는 일도 있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사적으로 타의에 의해 강제로 이사 간 사례들이야 많지만 여러 마을이 한꺼번에 강제로 철거되고 쫓겨난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구미에 국가공업단지가 들어서면서 핏줄과 땅줄로 똘똘 뭉쳐 살던 다섯 개의 자연 촌락이 ‘국가 대사’ 앞에 맥 한번 못 추고 쫓겨 나간 일이 1973년에 벌어졌다. 쫓겨난 사람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기도 하였지만 260세대는 집단으로 이주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 마을이 지금의 구미시 신평2동 마을이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후에 선산이 안동 임하댐 수몰 지역에서 쫓겨난 안동 양반 수몰민들을 받아들여 마을 하나를 만들어 주는 일이 벌어졌다.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가 바로 그 마을이다. 집도 절도 없던 야산에 새로 마을을 만들고 이름도 새로 지어 주었으니, 어느 향토사학자의 말대로 ‘구미 지도를 바꾼’ 일이 두 번째 일어난 것이다.

[버들나무, 또 물가에 자리 잡다]

안동 임하댐 수몰 지역에 편입되어 이주한 안동 양반 전주유씨들은 물가에 삶터를 자리 잡았다가 낭패를 본 사람들이다. 그러나 ‘버들은 물가에 살아야’ 한다고 또 다시 물가를 찾아 터를 잡았다. 전주유씨의 유(柳)가 버들 류 자이니 ‘버들은 물가에 살아야’ 함이 마땅하지만 이제 버들이 물에 잠겨 떠나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안동 양반 전주유씨들이 새 삶터로 자리 잡은 일선리낙동강 굽이치는 강가에 자리하고 있다. 선산읍에서 상주 방면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가다가 해평·의성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일선리를 찾아야 한다. 갈림길 있는 곳이 행정구역상 선산읍 생곡리이다. 여기서 해평·의성으로 가는 길을 골라잡아 잠시 가다 보면 일선교라는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다시 삼거리를 만나는데, 이 지점에 일선리로 가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오른편으로 꺾어 1㎞를 내달리면 낙동강변 언덕에 똬리를 튼 일선리를 만날 수 있다. 대구에서 올라치면 천평에서 상주로 향하는 낙동강변 국도를 따라 오면 대로변에서 이 마을을 만난다.

본래 일선리 땅은 마을도 아니고 논밭도 아니었다. 도리사를 품에 안은 태조산 뒤편에 뻗어 내린 산줄기가 낙동강에 닿을 즈음에 자잘하게 널려 퍼진 구릉 산지였다. 이곳은 밤이면 흙을 퍼 던지면서 오가는 사람들을 해친다는 ‘개골강지’가 출몰하는 외지고 무서운 산골이었다. 그러나 전통 마을 입지 요건의 첫 번째인 배산임수의 터전이요, 인근에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는 하천 부지가 있어서 은근히 양반들에게 매력을 주었던 모양이다. 거기다가 등과 급제하는 좋은 땅이라는, 용하다고 소문난 풍수 말에 대대로 학문을 숭상해 온 안동 양반들이 심사숙고하였던 곳이 지금의 일선리이다.

일선리가 자리 잡은 마을 터는 2만 평은 족히 된다. 집도 절도 없던 산골짜기를 정부가 중장비로 터를 다져 마련한 곳이다. 지금의 마을 양편 가장자리는 나지막한 산봉우리가 있었으나 양 봉우리는 깎아내고 골짜기는 메워서 평평하게 다져 지금처럼 만든 것이다. 지금 이 마을에는 약 80여 집이 모여 산다. 이 중 전주유씨가 대략 70집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타성들이다. 타성 5~6집도 임하댐 때문에 안동에서 이사 온 사람들이다. 나머지 타성들은 마을이 만들어진 후에 이사 온 사람들이다.

[선산에 자리 잡은 안동 양반들은 누구인가]

안동 양반 전주유씨들은 누구인가. 안동에 살아 온 전주유씨들은 1500년대 초에 처음 안동에 들어온다. 안동에 처음 들어 온 전주유씨는 유성이라는 사람이다. 당시 유성은 안동과 가까운 의성에 살고 있었다. 그는 오늘날까지도 안동의 명문으로 이름 날리고 있는 의성김씨 가문의 사위가 되어 안동 땅을 밟는다. 안동 내앞[川前]에 자리 잡고 살면서 5부자가 등과하여 명문 중의 명문으로 자리매김한 청계공 김진의 사위가 되어 안동 임동면 무실[水谷]에 입향한 것이다. 무실은 처가인 내앞과 20여 리도 채 안 되는 지척에 있다. 명문가의 사위가 된 유성이 당대의 빼어난 동량임에 틀림없었지만 불행히도 일찍 죽고 만다.

유성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호가 기봉(岐峰)유복기와 호가 묵계(墨溪)유복립이 그들이다. 유성의 두 아들은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유명한 외삼촌 학봉 김성일 밑에서 자라고 공부하였다. 그 후 장남 유기봉은 임진왜란 때 외삼촌 김성일과 함께 여강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남 일대에서 큰 공을 세웠고, 전쟁 중에는 의병들이 사용할 목적으로 8폭짜리 전국 지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나중에 정3품인 예빈시정이라는 벼슬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기양서당을 짓고 학문을 닦으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차남 유복립도 외삼촌 김성일 휘하에서 임진왜란을 헤쳐나간 인물이다. 유복립김성일과 함께 진주성을 방어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의병장 김천일 장군 등과 함께 자결하고 만다. 그 충성스러움으로 나중에 충신으로 정려되어 후대에 널리 알려졌다.

유성의 아들 중 차남이 후계 없이 전장에서 자결하였기에 남은 자손은 장남뿐이었다. 그래서 안동 땅 전주유씨들은 대부분 유복기의 자손들인 셈이다. 다만 무실과 이웃한 박실에는 입향 시조인 유성의 동생이 마을을 일구어 ‘수남위파’라는 종파를 이루어 살았다. 유기봉은 다복하게도 6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들 아들들을 정점으로 하는 지파들이 무실 인근과 멀리는 청송 진보와 부남에까지 분가하여 새로이 터를 잡고 마을을 일구고 살면서 박실 수남위파와 함께 무실 인근 지역을 전주유씨들의 텃밭으로 일구었다. 과히 향촌을 지배한 호족 세력이 된 것이다.

그 세력이 얼마나 컸던지 안동 땅에 사는 전주유씨들을 무실유씨라 따로 부를 정도이다. 이래저래 가지 친 파도 워낙 많아 입향 시조의 장남으로 이어져 온 종파를 비롯하여 무려 14개의 크고 작은 파로 나누어진다. 때로는 각 파의 시조들이 인근에 새로운 삶터를 찾아 분가하여 그곳에서 다시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무실 인근 지역이 전주유씨들의 세거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이루어진 마을을 살펴보면, 어머니 격인 무실과 박실을 본거지로 하여 전주유씨 용암공파가 일군 한들마을과 경곡위파가 살았던 원파마을, 참판공파가 살았던 고천 양지말, 경곡위파가 살았던 갈전, 사정공파가 살았던 마령 가르편 등 전주유씨로 얽힌 마을은 이밖에도 수없이 많았다.

자손이 많은 만큼 배출된 인재도 걸출하였다. ‘부는 삼백 석, 벼슬은 참판’이라 하였듯이 큰 부를 쌓거나 높은 벼슬은 하지 않았어도 학문을 숭상하여 큰 학자들을 배출한 집안이다. 불망기본(不忘其本)이라 하여 조상을 숭배하는 일을 근본으로 삼아 제사와 예를 숭상하기로 이름난 집안이었다. 한 터전에서 대대로 살았으니 무실유씨들이 남긴 문물도 많았다. 가문의 상징인 대종가를 비롯하여 지파들의 종택들은 한결같이 조선시대 양반들의 살림집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기양서당을 필두로 동암정·만령초당·침간정 등 학문을 숭상한 무실유씨들의 강학당 건물이 전통 문화의 산실인 안동의 중요한 문화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기양서당과 여러 종가에서 봉사해 온 숱한 불천위 제사는 예를 숭상한 무실유씨들이 근본 있는 가문임을 세상에 입증하는 산 증거였다.

임하댐은 이처럼 소중한 무실유씨 500년 역사를 물속에 넣어 버렸다. 500년간 다져 온 핏줄도 갈기갈기 끊어 놓고 말았다. 문물과 조상의 음택은 용궁에 묻어 놓고 몇 가지 세간을 챙겨 어떤 이는 아들 따라, 어떤 이는 친지 찾아 낯선 타향으로 이주하였다. 기양서당에 가부좌 틀고 앉아 무실유씨 양반됨을 자랑하던 지킴이들의 모습도 마을과 함께 묻혀 버렸다. 그나마 버리기 아까운 종물은 만수위를 피해 수몰지역 인근인 중평이주단지와 마령이주단지에 옮기긴 하였다. 고향 땅에 살고 싶은 몇몇 수몰민들도 문물 따라 이곳 이주단지로 이사하였다. 선산 일선리도 핏줄과 조상의 손 때 묻은 문물을 소중히 여기는 무실유씨들이 돈 모으고 뜻 모아 이주한 곳 중의 하나이다.

[힘들여 간택한 양반들의 삶터]

“무실[水谷]은 이름이 물에 잠기는 팔자라.” 임하댐이 만들어진다 하니 500년 역사를 물속에 넣어야 하는 무실 양반들의 자조 섞인 넋두리 말이었다. 그 옛날 안동 양반들이 그래 왔듯이 ‘국가 대사’에 숙명론을 설파한 것이리라. 임하댐 수몰민 중에는 이웃한 안동댐을 피해 새로 정착한지 10년이 못되어 다시 집을 물속에 처넣는 딱한 이들도 많았다. 그들도 ‘운명이 까지래요’라는 말로 체념하였다. 댐이 만들어지는 곳마다 숙명론도 있었고 운명론도 있었지만 임하댐 수몰민에게는 남다른 점이 있었으니, 찢어지는 핏줄에 대한 아쉬움이 너무나 컸다는 것이다. 그만큼 핏줄을 매개로 얽히고설켜 살아 온 무실 양반들의 ‘핏줄 전통’ 때문이리라. 그래서 임하댐 건설 초기부터 무실유씨들만의 ‘제2의 고향’ ‘집성촌’을 만들 일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노력들은 문중 차원에서 일어났다. 문중에서 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삶터를 물색하는가 하면 지원을 받기 위해 로비를 하기까지 ‘핏줄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눈물겨운 일들이 벌어졌다. 선산 땅 일선리는 이러한 노력 끝에 찾아 낸 무실유씨들의 ‘꿈터’였다. 무실유씨들이 처음부터 일선리를 간택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안동과 가까운 예천 신풍을 마음에 두었다. 그곳에는 파평윤씨들이 세거하고 있다. 장점이 많았지만 농지가 줄어든다는 이유로 주민들이 반대하여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 다음에는 상주 중동을 찾았지만 농지가 좁아 또다시 포기하였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이 선산 땅이었다.

안동 양반들이 선산을 선택한 이유는 고향 땅과 멀긴 하나 우선 영남 사림의 본거지이자 양반의 고장이라는 점이었다. 양반다운 택리 이유가 아닌가 싶다. 그 다음 이유가 토지 여건과 풍수지리에 좋은 땅이라는 것이었다. 선산이 양반 고을이라는 점은 익히 아는 터이고, 토지는 눈으로 보아 판별할 수 있는 터였지만, 마을 터를 풍수 보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이름 꽤나 있는 국풍을 불러 풍수 보기를 여러 차례 하였다. 결국 팔공산 지맥인 태조산을 배산으로 하고 태조산 줄기가 좌우에서 흘러 나와 마을을 감싸며, 마을 앞을 낙동강이 회류하니 ‘과거에 급제할 인물이 많이 나는 땅’이라는 대답을 얻은 곳이 이곳 일선리이다. 문중 어른들이 와서 보고 고개를 끄덕였으니 합격인 셈이었다.

터를 닦고 입주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처음 닥친 골칫거리는 마을 터가 풍수지리적으로 좋지 않다는 헛소문에 이주할 집들이 들쭉날쭉하였던 점이다. 어느 날 마을 앞 낙동강이 회류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흘러가니 좋지 않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처음에는 70집 정도 살 수 있는 터에 76집까지 늘어나 골치를 끓이더니 나쁜 소문에 갑자기 65집으로 줄어든 것이다. 다급하여 다시 풍수 잘 본다는 서울 국풍을 불러 터를 보아 여전히 좋다고 하자 이제는 79집으로 입주 희망자가 늘어나는 일이 생겼다. 양반들의 삶터 간택에 풍수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다. 일선리 수남위 종손 어른은 “박사가 여럿 나오고 행정고시, 기술고시 합격한 사람이 많이 나오는 걸 보니 풍수 말이 맞긴 맞아요.”라고 옛날을 회상한다.

그 다음 골칫거리가 땅 값이었다. 당시 임하댐 수몰 지역에서 받은 보상금을 합해야 1,000만원도 안 되는 집이 절반이었다. 이들은 보상금을 받아서 농가 빚을 갚다보니 모두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러니 막상 땅 사고 집 지을 돈이 모자라 오도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거기다가 고향 땅에서 대지 보상가를 10,000원 정도 받았는데, 일선리 대지 값은 15,000원이 넘어섰고, 하천 부지 1평을 5,000원에 불하하겠다고 약속했던 당국이 막상 이주지를 정해 놓고 살려고 하니 8,300원을 요구하는 바람에 거세게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논을 6,000원으로 조정하여 2년 거치 10년 상환 조건으로 사게 되었다. 그나마 벌어서 갚도록 하면서 해결된 것이다.

집집마다 적게는 200평 많게는 500평의 집터를 추첨으로 분양받고, 농사 지을 논 12마지기씩을 불하받기로 하면서 안동 양반들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일선리로 이사 올 때 무실유씨 양반집 할머니가 지었다는 「사향가」의 노래 말에서 안동 양반들의 체통과 타향살이에 대한 각오를 속속들이 읽을 수 있다. 한 향토사학자가 적어 놓은 것을 여기에 옮겨 보자.

단지 단지 숱한 단지/ 어디가서 사드라도/ 유가((柳家) 본색 잃지 말고/ 제2고향 건설하여/자손 유념 또 할세라/ (중략) 나라에 주선으로/ 땅 넓고 물 맑은 땅/ 선산 해평 명기(名基) 잡아/ 낙동강 칠백리에/ 산 넘고 물 건너니/ 고향은 아득하다/ 굽이굽이 다리 놓여/ 우리 살 곳 여기로다/ (중략) 삼촌의 우리 친척/ 형제같이 합심하고/ 서로 동정 아껴 가며/ 무실 한들 박실이니/ 다 같은 자손으로 허물 말고 기탄없이/ 일심동체 결의하여/ 보람차게 살아보세/ (중략) 서로 항상 조심하고/ 타향에 가서라도 /안동 양반 양반이라/호평 듣고 잘 삽시다.

[겉모습 반듯해도 예전만 같으랴]

사람들은 일선리를 문화재 단지라고 부른다. 무려 10여 건의 지정문화재가 즐비하고 이 마을 79집 중에 무려 70여 집이 무실유씨이니 그렇게 부를 만도 하다. 전후사정 모르고 찾아오는 이들이야 잘 구획된 마을 환경에 고색창연한 옛 건축물이 한 군데 모여 있으니 문화재 단지로 손색없다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일선리 안동 양반들이 살던 옛터와 비교하면 물속에 잠길 뻔한 문화재급 건물 몇 채만 겨우 수습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 500년 정취를 몸에 담아 온 이곳 양반들에겐 반눈에도 찰 리 없다. 우선 일선리 안동 양반들은 그 많던 무실유씨 안동 양반들 중 일부만 여기에 온 것을 못내 아쉬워한다. 무실유씨의 모태인 무실에서 온 31집과 이웃 박실에서 온 29집, 한들에서 온 10집을 합해 한 70집 정도가 모두이다. 그 옛날 무실에만 무실유씨들이 86집이나 살았으니 성에 찰 리 없다.

무실 양반들의 애초 꿈은 정말로 원대했었다. 한마디로 물에 잠겨 사라질 무실유씨의 근본을 양반의 고장 선산에 재건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무실유씨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상징물인 무실 대종가는 물론 기양서당과 정려각까지 이곳으로 이건할 작정이었다. 그 다음 지파의 종가와 누정까지 옮겨 무실유씨 ‘제2의 고향’이자 무실유씨만의 ‘집성촌’을 만들 생각이었다. 아쉽게도 꿈은 절반도 이루어 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이주단지 뒤쪽 주산의 맥이 흘러내리는 명당 자리에 마련해 둔 대종가 자리 600평은 잡초만 무성한 채 비어 있다. 이미 다른 이에게 팔렸단다.

마을 앞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 좋은 터 800평에 ‘기봉할배’의 혼이 묻은 기양서당과 입향조 할매의 열(烈)을 담은 정려각을 옮겨 세울 요량이었으나 대종가가 안 오는 바람에 빈터로 남아 있다. 이런 모양새를 두고 ‘속없는 찐빵’이라고 하던가. 오기로 했던 대종가가 못 온 사연이 신통찮다고 할 뿐 끝내 숨기고 만다. 이루지 못한 꿈을 아쉬워할 뿐 들추지 않고 명문가의 체통을 지키려는 양반들의 속내가 아름답다.

그나마 박실마을 전주유씨를 이끌었던 수남위 종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51호)과 용와 종택, 침간정(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8호), 맛재(마령)를 대표하는 호고와 종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57호), 무실마을의 ‘작은집’인 근암 고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5호)과 임하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8호)이 이곳에 왔다. 이밖에도 학문과 예를 숭상해 온 전주유씨들을 표상해 해 주는 만령초당(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8호), 삼가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0호), 동암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2호), 대야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4호) 등의 누정들이 이곳에 왔으니 체면은 세운 셈이다. 하나같이 조선시대 안동 지역의 문화와 환경을 반영하고 있는 살림집과 누정 건물이려니와 안동 문화를 선산에 옮겨 심은 격이 되었다.

마을 생김새도 옛 마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이곳 일선리는 만곡을 그리던 동구 길도 없다. 마을을 경계지우고 쉼터가 되었던 마을 숲도 없다. 그저 마을 앞 직선도로에서 마을로 오르면 골목길이 시작된다. 편리할지는 모르나, 옛 마을들이 숨기려 애썼던 속살이 훤히 드러나니 민망하다고나 할까. 마을 안길과 샛길도 아스팔트 직선길이다. 잘 구획되어 바둑판을 이루니 우마차가 다니기는 좋지만 전통 마을의 경관은 영 아니다. 그래도 문화재 계급장 단 집을 들어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옛 집의 정취를 풍기니 그래서 문화재 단지라 하나 보다.

마을 생김새야 오늘날 살기에 맞춘 것이라지만 옛날과 같아야 할 마을 인심조차 옛 마을과는 달라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란다. 핏줄은 같으나 살던 마을이 달랐던 전주유씨들이 한 마을을 이루고 살다보니 같은 마을에 살던 사람들끼리 모여 패 갈림이 일어나기도 한다. 상례나 혼사 등 ‘큰일’이 생기면 마을 전체가 울력하던 옛날과는 달리 같이 살던 사람들끼리 모여 일을 처리하는 모습이 서로의 눈에 어색해 보인다. ‘핏줄(혈연)’이 더 강한 줄 알았더니 이곳에서는 ‘땅줄(지연)’이 더 강한 모양이다.

마을 사람들이 잘 적응하고 있는지 궁금하여 금방 버스에서 내린 할머니에게 느닷없는 질문을 했다. “할머니 여기 살기 좋아요?” 하니, 머뭇하던 할머니 “살기 좋제.”라고 인사치레처럼 불쑥 내뱉는다. 다시 묻기를 “할머니는 어디 살다 오셨어요?” 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단번에 “나, 무실에 살았지. 왜?” 한다. 다시 “무실 참 좋은 동네였지요.”라고 향수를 건드리니 “처음에는 영 못살겠더니 정이 드니 살 만 하네요.”라고 알듯말듯한 소리만 남기고 대문 안으로 사라진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는 유행가 가사를 듣는 듯 했다.

토질과 환경이 달라 처음에는 농사짓기도 어려웠단다. 안동에서는 마늘과 담배, 고추 농사로 먹고 살았지만 여기 토질에는 맞지 않았다. 여기 사람들은 생소하게도 참외, 수박, 오이, 토마토 농사를 하고 있었다. 농사법을 모르니 처음에는 손에 익은 벼농사를 짓다가 열심히 배워서 지금은 일선리 안동 양반들도 손색없이 특작을 한단다. 환경을 바꾸면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러지는 법이니 농사일도 이들의 적응에 장애가 되었던 것이다.

일선리 안동 양반들은 아직도 늘 안동과 연을 맺고 산다. 대종가와 조상들의 산소가 거기 있으니 문중 일은 모두 거기서 꾸려진다. 아직도 일가가 안동에 많이 사니 길흉사에는 빠짐없이 들려야 한다. 친구도 옛 친구가 좋은지 여기서는 친구 사귀기가 쉬운 것이 아니란다. 비록 선산에 살지만 안동 땅과 맺은 500년 인연을 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남위 종택을 지키는 류해종 종손 어른은 “늘 고향이 그립네요.”하며 자신도 모르게 안동 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참 딱해 보였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 언제까지 계속될련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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