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5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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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許亨植 |
영어음역 | Heo Hyeongsik |
이칭/별칭 | 허극(許克),허연(許埏)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인호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허형식(許亨植)은 1909년 11월 18일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에서 허필(許苾, 1855~1932)의 아들로 태어나 조국 광복을 위해 온 몸을 바쳤던 항일투사였다. 본명은 허극(許克)으로 알려져 있으나 호적에는 허연(許埏)으로 등재되어 있다. 한말 의병장 왕산 허위(許蔿, 1855~1908)의 종질이기도 하다.
허형식은 북만주 일대에서 동북항일연군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므로 그의 활동이 바로 우리 민족해방투쟁사의 일환이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이끌었던 동북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 제3군의 모체가 된 주허유격대는 조선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일종의 민족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당숙인 허위의 의병 투쟁에서부터 시작하여 허씨 가문의 남만주에서의 계속되는 항일 투쟁, 그리고 허형식의 북만주에서의 항일 무장 투쟁 활동은 단순한 개인의 투쟁 차원을 넘어서서 구미 지역 출신 한 집안의 항일운동이 의병 운동에서 독립운동과 적색 혁명 운동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사상적 궤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활동사항]
1908년 의병장 허위가 일본군에 붙잡혀 순국한 후 계속되는 일본 순사들의 학대에 시달리던 허씨 집안은 간도로 망명하기로 결정하였다. 1912년 허위 유가족이 망명하고, 3년 뒤 허형식의 가족도 망명하였다. 이들은 망명 초기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1916년 류허현에 자리잡게 되었다.
1920년대에 일본이 간도 지역으로 침공해 오자 허필 가족은 헤이룽장성 주허현을 거쳐 랴오닝성 카이위앤현[開原縣] 리지아타이쯔[李家台子], 헤이룽장성 우창현[五常縣], 헤이룽장성 빈현(賓縣) 등지로 옮겨다녔다. 허형식은 빈현으로 이사한 1929년경부터 한인 공산주의자들과 활동을 같이하였다. 허형식은 1930년 초 빈현의 가판참(枷板站)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허형식은 1930년 5월 1일 메이데이를 기념하는 시위와 일본영사관 습격에서 두각을 나타낸 후 1932년 빈현의 선전위원이 되었다. 1933년 10월 주허 반일 유격대 건립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1934년 6월 동북반일유격대 합동(哈東)지대가 건립되자 제3대대 정치지도원이 되었다. 이후 허형식은 본격적인 항일 무장 투쟁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935년 1월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 제1독립사에서 선전부장과 제2단장을 지냈으며, 1936년 이후에는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1사 정치부 주임, 의동판사처(依東辦事處) 주임, 제9군 정치부 주임, 제3군 제1사 사장, 서북임시사령부 총참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9년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이 편성되자 제3로군 총참모장 겸 산하 제3군장, 제3로군 총참모장 겸 12지대 정치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무장 투쟁을 주도하였다. 총참모장은 중국인을 포함한 동북항일연군의 최고위급 책임자로 허형식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41년부터 일본이 북만주에서 활동하던 제3로군을 집중 공격하면서 커다란 손실을 입게 되어 소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허형식은 북만주에 남아 소부대 활동을 지휘해나갔다. 1942년 7월 말 허형식은 빠이엔[巴彦]·무란[木蘭]·뚱싱[東興] 등지에서 활동중인 소부대의 활동을 고취하기 위해 갔다가 8월 3일 경성현(慶城縣; 현 칭안현) 칭쏭링[靑松嶺] 샤오링허[邵凌河] 계곡에서 노숙하다가 만주국 토벌대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중국 헤이룽장성 칭안현 당국은 1998년 10월 20일 허형식이 전사한 칭쏭링 입구에 허형식의 희생지임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워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