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5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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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載華 |
영어음역 | Choe Jaehwa |
이칭/별칭 | 백은(白恩),최재하(崔在河),최동수(崔東秀)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산양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박인호 |
성격 | 독립운동가|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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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산양리 |
성별 | 남 |
생년 | 1892년 |
몰년 | 1962년 |
본관 | 경주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목사.
[개설]
최재화의 호는 백은(白恩), 본관은 경주이다.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산양리에서 최도원(崔道源)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이명으로 최재하(崔在河), 최동수(崔東秀)를 사용하였다.
[활동사항]
최재화는 서울 경신중학교를 졸업하고 해평면 산양동에 내려와 신앙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19년 만세 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나자 4월 3일 해평면 해평동에서 인근 군중 약 60~70명과 함께 해평주재소로 몰려가 독립 만세 시위를 벌였다. 근처 각지의 일본 경찰이 몰려와 대부분의 시위 군중을 체포하자 피신하여 조선인 관리에게 사직을 권유하는 경고문을 배포하는 등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상주에서 체포되었다가 대구로 이송되는 도중 탈주하여 7월 일본을 거쳐 중국 베이징으로 탈출하였다. 그곳의 교민단 대표로 상해 임시정부의 최고정치회의에 참석하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일제는 1920년 12월 22일 대구 복심법원의 궐석재판에서 최재화에게 8년형을 언도하였다.
1926년 중국의 화북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중국 지린성[吉林省] 등지에서 한인 교회를 세워 동포들에게 헌신하다가 1931년 대구제일교회에 부임하여 1932년 현 교회당을 신축하였다. 그 외 대구장로교 신학교장,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경성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 계명대학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사회사업과 교육 사업에 헌신하였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및 선산군 유지들이 1963년 12월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산양리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1980년 정부로부터 1980년에 대통령표창을 받았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