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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1500
한자 張志淵
영어음역 Jang Jiyeon
이칭/별칭 장지윤(張志尹),위암(韋庵),숭양산인(崇陽山人)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용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언론인|학자
출신지 경상북도 상주시
성별
생년 1864년 11월 30일연표보기
몰년 1921년 10월 2일연표보기
본관 인동
대표경력 경남일보 주필

[정의]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에 경상북도 구미에서 활동한 언론인이자 학자.

[개설]

장지연은 1864년(고종 1) 경상도 상주목 목내면 동곽리에서 출생하였다. 처음 이름은 장지윤(張志尹)이고 호는 위암(韋庵) 또는 숭양산인(崇陽山人)이다. 소매당 장영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운소(雲沼) 장용상(張龍相)이고, 장석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세 때 경상북도 구미시 오태동으로 이거했다가 20세 때 구미시 상모동으로 옮겨 20년을 살았다. 과거제도가 없어지기 직전인 1894년(고종 31)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1906년 서울 제동으로 이사했으며, 만년에는 경상남도 마산에서 살다 타계하였다.

한편, 구례 화엄사의 승려였던 호은대사[1850-1918]를 기리기 위해 1918년 건립한 호은대율사비(虎隱大律師碑)에 ‘제자 숭양산인(崇陽山人) 장지연이 삼가 기록한다[謹誌]’라고 새겨져 있어 호은대사의 제자였던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활동사항]

장지연은 과거에 입격한 직후인 1895년(고종 32) 10월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처에 발송하였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고종의 환궁을 호소하는 만인소를 기초했다. 이 해에 사례소(史禮所) 직원으로 『대한예전(大韓禮典)』 편찬에 참여하고, 이듬해 내부주사(內部主事)가 되었다가 곧 사직하였다. 1896년 7월 독립협회가 창립되자 여기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898년 9월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창간되자 기자로 활약하였다.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에서 간부로 활약하다가 1898년 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해산당할 때에 경무청에 체포되어 일시 투옥되기도 했다.

1899년에는 『시사총보(時事叢報)』의 주필로 취임했다가 이듬해 사직하였고, 광문사(廣文社)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와 『흠흠신서(欽欽新書)』를 간행하였다. 1900년(고종 37) 『황성신문』의 주필을 거쳐, 1901년 사장을 맡아 민중 계몽과 독립 정신 고취에 진력하였다. 1905년(고종 42) 11월 17일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국권을 박탈하고 이를 비밀에 부치자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써서 사전 검열을 받지 않고 서울 시내에 배포하였다.

이 논설에서 장지연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기만책을 폭로하여 통렬하게 비판하고, 4천 년 독립 국가와 3천리 강토와 5백 년 종사를 다른 나라에 바치며, 2천만 동포를 다른 나라의 노예로 만드는데 동의한 을사오적을 개돼지만도 못한 매국노라고 준열히 비판했으며, 장차 노예로 전락할 위험이 있는 우리 2천만 동포는 죽었으면 모르겠으나 2천만 국민 정신이 살아 있으면 국권 회복에 분발하여 궐기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 논설은 서울 시민과 전국 국민들의 을사조약 반대 투쟁과 국권 회복 운동을 촉발시켰으나, 장지연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고 『황성신문』은 압수와 정간 처분을 받았다. 장지연이 1906년 1월 석방되고 이어서 신문도 복간이 허용되었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사장과 주필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1906년 3월 윤효정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본격적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휘문의숙장(徽文義塾長)을 역임하였다.

1907년 1월 대구에서 김광제·서상돈 등을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신문사와 잡지사들이 참여할 것을 촉구하는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7월 일제가 헤이그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탄압법을 연달아 제정하자 대한자강회 회원들과 함께 격렬한 반대 시위 운동을 전개했으며, 이로 인해 대한자강회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 당하였다.

이에 1907년 11월 권동진·남궁억 등과 함께 대한협회를 발기하여 조직했다. 1908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海參威]로 망명하여, 『해조신문(海朝新聞)』 주필로서 민중 계몽과 독립 정신 고취에 힘을 다하였다. 1908년 귀국하여 1909년 영남 지방 교육 구국 운동 단체인 교남교육회의 취지문을 지었고, 같은 해 10월 『경남일보』 주필이 되었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게 되면서 이에 항의하여 선비들이 연이어 자결하자 황현의 「절명시(絶命詩)」를 『경남일보』에 게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경남일보』가 폐간되고 장지연도 언론인으로서의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1911년 이후 향리에 칩거하며 시부(詩賦)와 음주로 울분을 토하다가 1921년 10월 마산에서 타계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대한예전(大韓禮典)』 10권,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 3책, 『동국류사(東國類史)』 10권, 『일사유사(逸士遺事)』 5권, 『대동시선(大同詩選)』 17권, 『농정전서(農政全書)』,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 『동국역사(東國歷史)』, 『대동문수(大東文粹)』, 『대한신지지(大韓新地誌)』, 『동유기(東遊記)』, 『만국사물기원역사(萬國事物紀原歷史)』, 『위암문고(韋庵文稿)』 등이 있다.

[묘소]

장지연의 묘소는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에 있으며,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효자봉에는 그의 아버지의 묘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공로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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