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4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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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陸洪均 |
영어음역 | Yuk Honggyu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옥성면 주아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용만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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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구미시 옥성면 주아리 |
성별 | 남 |
생년 | 1900년 |
몰년 | 1983년 |
본관 | 옥천 |
대표경력 | 제헌국회 국회의원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육홍균의 본관은 옥천(沃川)으로 아버지 육병형(陸炳亨)과 어머니 예천임씨(醴泉林氏) 사이의 독자이다. 선산 옥성 주아리에서 태어났다. 슬하에 육철(育轍), 육종서(育鍾瑞), 육종국(育鍾局) 3형제를 두었다.
[활동사항]
육홍균은 수원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日本大學) 문과에 재학 중이던 1922년 무정부주의를 표방한 비밀결사 흑우회(黑友會)에 가입하여 『흑우(黑友)』와 『소작농(小作農)』 발간을 주동하였으다. 1923년에는 박열(朴烈), 김중한(金重漢), 서동성(徐東星) 등과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였으며 같은 해 9월 투옥되었다. 출옥 후인 1926년 10월 흑우회를 흑색청년연맹(黑色靑年聯盟)으로 고쳐 조국독립운동에 전력하였다.
1927년 고향 선산에 돌아와 협동조합 ‘우리살림사’를 조직한 데 이어 옥성농우회(玉城農友會)를 이끌고 이듬해부터 헌신적으로 농민운동을 지도하였다. 1939년 4월 선산경찰서에 검거되어 1년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루었다. 이후 중국에 체류하다가 광복을 맞아 건국독립촉성국민회(建國獨立促成國民會) 선산군지부장에 취임하여 활약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국회의원으로 뽑혀 농지개혁법, 양곡매입법의 제정 때 농민의 대변자로서 소작 농민들의 억울함을 해결하는 데 힘썼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된 뒤, 1952년 5·26 정치 파동 때 큰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5·16혁명 후 1963년 오월동지회 지도위원을 역임하였으며, 1969년 토지개량조합연합회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서훈받았으며, 사후인 1990년 광복절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일생을 애국애족과 청렴결백으로 일관한 육홍균의 의연한 삶을 기리고, 그 드높은 정신을 길이 후세에 전하기 위해 석비에 ‘비봉산(飛鳳山) 위 푸른 달빛/ 천추만대(千秋萬代) 비추는데/ 구국애민(救國愛民) 임의 의덕(義德)/ 그 빛 속에 어렸네라/ 언제나 낙동청풍(洛東淸風) 따라/ 길이길이 빛나소서’라고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