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4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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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寬默 |
영어음역 | Gim Gwanmuk |
이칭/별칭 | 직부,경재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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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 |
성별 | 남 |
생년 | 1894년 |
몰년 | 1976년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관묵(金寬默)은 김태동(金太東)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자는 직부(直夫), 호는 경재(敬齋)이다.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에서 태어나서 자라다가 15세 때 아버지를 따라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으로 이사하였다.
[활동사항]
1919년 3·1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자, 가조면에서도 3월 20일 장기리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만세 운동을 주동하던 김병직(金秉直)·어명준(魚命俊) 등이 사전에 붙잡혀서 거창 일본군 헌병대에 갇히게 되었고, 오문현(吳文鉉)·신병희(愼炳禧)·어명우(魚命佑)·어명철(魚命喆)·이병홍(李秉洪)·김호(金濩) 등 여섯 사람이 추진위원이 되어 3월 21일 가조면과 가북면(加北面) 일대에서 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계획을 탐지한 거창의 일본군 헌병대는 3월 22일 아침 주동 인물들을 체포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김관묵은 가조면과 가북면 군민 3천여 명과 함께 3월 22일 오후 2시 30분경, 몽둥이를 가지고 장기리 만도정(晩嶋亭) 앞에서 대형 독립기를 세운 후, 주동 인물의 석방을 요구하며 거창읍 일본군 헌병대로 행진하였다. 군중이 사포현(沙浦峴)에 이르렀을 때, 거창의 일본군 헌병대와 용산 일본군 헌병분견대가 합세하여 진로를 막고 공포를 발사하며 해산을 명하였다.
그러나 김관묵은 이에 굴하지 않고 시위 군중과 함께 함성을 지르며 헌병들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군 헌병들의 총기의 무차별 발사로 많은 사상자를 내고 시위 군중은 해산하였다. 김관묵은 곧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같은 해 5월 31일 부산지방법원 거창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82년 8월 15일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