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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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慶遇 |
영어음역 | Jang Gyeongu |
이칭/별칭 | 태래(泰來),만회당(晩悔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권삼문 |
성격 | 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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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 |
성별 | 남 |
생년 | 1581년 |
몰년 | 1656년 |
본관 | 인동 |
[정의]
조선 후기 구미 출신의 유생.
[가계]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태래(泰來), 호는 만회당(晩悔堂). 덕령부군 장안세(張安世)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극명당(克明堂) 장내범(張乃範), 어머니는 진위장군 이운배(李雲培)의 딸로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할동사항]
장경우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일어나자 영남 유생들과 상소하여 이를 반대하였고, 이이첨(李爾瞻)이 권세를 잡고 국정을 어지럽게 하니 이이첨을 참수하라는 소를 올렸다.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아 의병장이 되어 강도(江都)까지 출정하였으나 조정이 강화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 같은 해 진사에 합격하고 1654(효종 5)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영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고향에 머물면서 스승 장현광의 문집인 『여헌문집(旅軒文集)』을 간행하고 『제선의절(祭先儀節)』을 만들어 시행하도록 권장하였으며, 화산서당(花山書堂)을 건립하여 후진의 교육에 힘썼다. 또한 평소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상을 당해 3년간 시묘하였다. 묘소는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의 정산(鼎山)에 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만회당집(晩悔堂集)』이 있으며 그 중 「법천설(法天說)」, 「선악적서(善惡籍序)」 등 철학적으로 중요한 글이 포함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사후에 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다. 인동의 동락서원(東洛書院)에 배향된 후에 경상북도 구미시 인의동에 있는 옥계사(玉溪祠)에도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