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3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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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安世 |
영어음역 | Jang Anse |
이칭/별칭 | 송은(松隱),충정(忠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박인호 |
[정의]
고려 후기 구미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인동(仁同). 호는 송은(松隱). 장금용(張金用)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밀직사부사 장순(張純), 아버지는 장균(張均)이다.
[활동사항]
장안세는 고려 후기 함주(현 함경남도 함흥시)에 있는 갈한천(乫罕川)이 해마다 범람하여 재해가 연속되자 함주부사에 임명되었다. 10여 년 동안 재임하면서 치수에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70칸이 되는 만세교(萬歲橋)를 가설하는 등 수리 사업에 많은 업적을 쌓아 덕녕부윤(德寧府尹)에 제수되었다.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광덕산 기슭에 있는 두문동(杜門洞, 현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에 은둔하였다. 이성계와는 잠저 때 친교가 있어 태조가 친필로 여러 번 출사를 청하였으나 끝내 나가지 아니하고, 아들 장중양(張仲陽)과 함께 고향인 인동으로 낙향하여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장안세의 행적은 김집(金集)이 기록한 『두문동칠십이현록(杜門洞七十二賢錄)』에 전한다.
[저술 및 작품]
후손들이 유문과 관련 기록을 편집한 2권 1책의 『송은선생실기(松隱先生實紀)』가 전한다.
[상훈과 추모]
1774년(영조 50) 후손들이 세운 옥계사(玉溪祠)에 배향되었다. 옥계사 창건 무렵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유허비 비문을 지었다. 영남 유생들의 청원에 의해 1834년(순조 34) ‘충정(忠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옥계사는 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묘우가 철거되었으나 1989년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인의동에 묘우를 중건하고 강당을 중창하고 동서재를 신축하였으며 이듬해 옥계서원(玉溪書院)으로 개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