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2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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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汝良 |
영어음역 | Yi Yeorya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용만 |
[정의]
고려 후기 구미 지역에 은거한 문신.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아버지는 평양소윤 이문광(李文廣)이다.
[활동사항]
이여량은 1380년(우왕 6)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좌랑에 제수되었다. 1386년 사간원좌정언에 올랐다. 이 무렵 우왕이 놀이에만 여념이 없었고 폐신(嬖臣) 노영수(盧英壽) 집에 자주 행차하여 정사를 소홀히 하는 일이 허다했다. 이에 이여량은 다른 신하와 더불어 배종했다가 간관으로서 충간하자 우왕은 오히려 공무가 호빈(浩頻)한데 왜 따라다니느냐고 꾸중하였고 또 남산대(南山臺)에 올랐을 때도 유독 이여량의 호종만을 힐책하였다.
이에 이여량은 간관 정교리(鄭敎厘) 등과 더불어 “방금 왜구가 침범하고 초적(草賊)은 날뛰고 간첩이 호시탐탐 엿보고 있는 이때 어찌 편안한 날만 보내셔야 되겠습니까?”고 상소하였으며 “전대 충혜왕이 간언을 듣지 않고 황음(荒淫)했기 때문에 원(元)의 버림을 받아 악양(岳陽)으로 귀양 가서 죽었다”는 고사(古事)를 들어 충간하였지만 우왕은 받아들이지 않고 외직인 강원도안렴부사로 보냈다. 조선이 건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굳혀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더불어 금오산 아래에 은둔하며 절의를 지키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묘소는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에 있다.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봉남리에 유허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