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09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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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大遂 |
영어음역 | Gang Daesu |
이칭/별칭 | 대진(大進),면재(勉哉),학안(學顔),춘간(春磵),한사(寒沙),정와(靜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 초명은 대진(大進), 자는 면재(勉哉)·학안(學顔), 호는 춘간(春磵)·한사(寒沙)·정와(靜窩). 증조할아버지는 강인수(姜仁壽)이고, 할아버지는 강세탁(姜世倬)이다. 아버지는 사간 강익문(姜翼文)이며, 어머니는 합천이씨(陜川李氏)로 이후신(李後臣)의 딸이다.
[활동사항]
강대수는 1610년(광해군 2)에 진사가 되고,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설서, 사서를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에는 사간원정언이 되었으며, 1614년(광해군 6)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였을 때 정온이 간언하다가 유배되자 정온을 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때문에 평소에 반목하던 대북의 권신 정인홍(鄭仁弘)의 모함으로 삭직당하고 회양에 유배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영변부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그 뒤에 호조좌랑·예조정랑에 올랐다. 1624년(인조 2)에 사헌부정언·지평·장령을 역임하였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정경세(鄭經世)를 따라서 영남에 가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3월에 청나라와 화친하자 돌아와 사간·주부를 지냈다. 1628년(인조 6)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631년(인조 9)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이 되었으며, 이어 수찬·부교리 겸 경연시독관·군자감정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광해군의 난정에 항소하다가 유배를 간 아버지 강익문(姜翼文)을 구하기 위해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풀려나게 했다.
1637년(인조 15) 부응교를 지내고, 1939년(인조 17) 통정대부가 되었다. 1641년(인조 19)에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진주에서 살다가 1644년(인조 22)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이 되었으며, 이어 우승지·병조참지·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51년(효종 2)에 전주부윤을 지냈으며, 관직에서 물러나 여러 차례에 걸친 임금의 소명에도 불구하고 다시 관도에 오르지 않았다. 강대수가 죽자 세상 사람들이 현대부(賢大夫)를 잃었다고 슬퍼하였다.
[학문과 사상]
강대수는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제자로는 조선 후기의 문신 노석빈(盧碩賓; 1639~1703)이 있다. 밀양부사로 있으면서 17세기 새로운 향약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김기향약’에 입의(立議) 18조를 첨가하여 ‘인조무자절목’이라는 향약을 제정하였다. 향약의 주요 내용은 교화의 강조, 향리의 통제, 상부상조 기능 등이었다. 이 향약이 계속해서 시행되지 못한 이유는 밀양 사족간의 갈등, 즉 남인계와 노론계 사족간의 대립으로 인한 향촌의 분열과 향리를 천거하는 데 향청을 거치도록 한 규정에 향리 계층이 반발했기 때문이었다.
1644년(인조 22)에 합천군수 조희인(曺希仁)이 죽죽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죽죽이 백제군을 맞아 싸웠던 자리에 신라충신죽죽비라는 비석과 비각을 세웠는데, 강대수가 비문을 지었다. 또 생존해 있을 때 학문하는 사람들을 생각하여 석천서재(石泉書齋)를 지었으며, 또한 유학자들을 위하여 이연서원(伊淵書院)과 덕곡서원(德谷書院)을 지었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한사집(寒沙集)』 7권 3책이 있으며,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이 엮은 『근묵(槿墨)』에 강대수의 시가 있다. 또한 『죽헌집(竹軒集)』, 『동계집(桐溪集)』, 『환성재선생문집(喚醒齋先生文集)』, 『부매헌집(附梅軒集)』 등에도 강대수의 작품이 남아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문림리에 있는 도연서원(道淵書院)에 주이(周怡)·강인수(姜仁壽)·문익성(文益成) 등과 함께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