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0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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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武官學校募集事件 |
영어의미역 | Invitation of Military School |
이칭/별칭 | 제2최재화사건,무관학교 생도모집사건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성격 | 항일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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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19년 6월 |
종결연도/일시 | 1920년 2월 |
발생(시작)장소 | 경상북도 구미시 |
관련인물/단체 | 최재화|배승환|김두칠|강수남 |
[정의]
1919년 6월 최재화가 주동이 되어 경상북도 청년들을 만주 신흥무관학교로 보낸 사건.
[역사적 배경]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각지의 뜻있는 인사들은 새로운 투쟁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해평 산양리의 최재화(崔載華, 1892~1962)는 1919년 4월 2일 밤 동민들을 이끌고 고향인 해평경찰서(海平警察署) 주재소(駐在所)를 습격하였다. 또한 대구로 나가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 김수길(金壽吉) 등과 함께 비밀결사 혜성단(慧星團)을 조직하였다.
일본인 관리에게 경고 격문을 보내고, 한국인 관공리에게는 사직·비협조 권고문을 보내는 한편, 대구부 시장의 상인들에게는 폐점(閉店) 시위할 것을 권고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그는 독립운동의 방법상 만세운동이나 경고문을 발송하는 정도로서는 독립을 쟁취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목적]
국내의 장정들을 모집하여 만주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입교시킴으로써 항일투쟁의 군사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발단]
3·1독립만세운동과 비밀결사 혜성단의 활동에서 몸을 숨긴 최재화는 만주와 국내를 오가며 군사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는 경신학교 재학 때의 은사 김규식(金奎植), 김창환(金昌煥)과 연락하여 만주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소속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와 연락하고자 하였다.
그의 이러한 뜻은 1919년 6월 하순 서로군정서에서 파견한 인사를 대구 달성공원(達城公園)에서 만나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서로군정서에서 온 인사는 국내의 청년들을 포섭하여 신흥무관학교로 보내라는 지령의 비밀 서한을 전달하였다. 여기서 최재화는 국내 독립군 모집의 총책임자에 임명되었다.
[경과]
최재화는 신의주에서 여관업을 경영하며 애국지사들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하는 중간모집책 김영철(金永喆)을 서울 장춘단공원에서 만나 무관학교 생도모집에 대한 의논을 하였다. 그 결과 최재화가 선정한 사람을 김영철에게 보내면, 김영철은 만주 안동현(安東縣)의 조강제(趙强濟)에게 보내고, 조강제는 다시 신흥무관학교로 보내어 그곳에서 군사교육을 시켜 다시 국내로 잠입시키기로 하였다.
일에 신중함을 기하기 위해 최재화가 국내에서 청년들을 보낼 때는 손바닥에 “十”자를 써서 암호로 썼다. 신의주에서 김영철은 동지 이도성(李道成)과 함께 이 청년들에게 압록강을 건너게 해주었고, 안동현에서 기다리던 조강제는 ‘강(强)’이란 글자를 종이돈 뒷면에 적어 그것을 신표(信標)로 유하현(柳河縣)의 신흥무관학교나 상해의 임시정부로 갈 수 있게 하였다.
국내에서는 상주의 배승환(裵昇煥), 안동의 김두칠(金斗七), 수원의 강수남(康壽南)이 최재화와 함께 청년 모집에 힘썼다. 이리하여 최재화는 상주의 조성순(趙誠淳) 유우국(柳佑國), 배승환은 예천의 권원하·이재영(李纔榮)과 상주의 조태연(趙台衍), 안동의 권재수(權在壽), 그 외에 동아일보 사무원 김종엽과 천세환(千歲桓)을 포섭하여 만주로 보냈다.
그 중 권원하와 김종엽은 1919년 8월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여 1920년 1월 하순 제4기생으로 졸업하고, 천세환은 서로군정서원 김세연(金世淵)에게 보내져 군사교육을 받았다. 그 후 권원하와 김종엽은 1920년 2월, 천세환은 1920년 7월 군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로 몰래 들어와 활동하였다. 그러나 권원하가 군자금 모집 국내 총책 김병두(金炳斗)와 연결하여 활동하다가 경상북도 왜관(倭館)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히면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결과]
1920년 9월 24일 이 사건이 검찰에 송치되어 재판에 회부된 인사는 17명이었는데, 경상북도 출신 인사로는 최재화·배승환·권원하·이재영·권재수·유우국·김병연·김두칠·조성순·조태연 등 10명이었고, 그 외 조강제·김영철·강수남·허상신·이도성·김종엽·최재환 등 7명이었다.
최재화에게는 12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궐석재판으로 8년 형이 선고되었다. 이로써 무관학교 생도모집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주동자 최재화도 상주에서 체포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하였고, 그 후 상해의 임시정부와 화북신학교를 거쳐 1931년 대구제일교회로 돌아와 목회자 활동을 하였다.
[의의와 평가]
무관학교 생도모집사건은 선산 출신 최재화를 비롯한 경상도 인사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무관학교 생도모집의 필요성은 두말할 것 없이 3·1만세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3·1만세운동은 기본적으로 정의와 양심에 호소한 평화적이고 시위적인 성격의 운동이었다. 그러므로 무단일변도(武斷一邊倒)의 식민통치를 자행하는 일본제국주의에게는 이것이 통할 리 없었다.
최재화의 무관학교 생도모집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이고, 조직적이고, 계속적인 투쟁이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군사력을 길러야 하는데, 그 선결 과제가 군사훈련을 위한 군사 지도자 양성이라는 것을 직시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흥무관학교 생도모집은 독립을 염원하는 애국지사들의 소망이었을 뿐 아니라 시대적 요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