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3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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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銅雀津 戰鬪 |
이칭/별칭 | 동작진 병사(銅雀津 兵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차인배 |
[정의]
조선 후기 정유재란 당시 동작진에서 행해졌던 일련의 군사활동.
[개설]
동작진 전투는 정유재란 당시 한강 이남 나루인 동작진에서 벌어진 군사행동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실제 중대한 전투사실은 없으며, 전쟁 상황에서 군대의 주둔지로 사용되거나 군사훈련이 진행되었다.
[역사적 배경]
1592년 4월 임진왜란 개전 후 조정은 국토의 북단 의주까지 몽진하였고, 명(明)으로 원병을 요청하여 대규모 병력이 조선 내에 진주하였다. 한반도의 남단으로 철수한 일본군은 1597년 1월 부터 약 15만의 병력으로 재침해왔다.
『속대전(續大典)』에는 한강 나루 중 국가가 관리하는 진도를 11개소로 열거하고 있으나, 교통수요 등에 따라 그 수는 가감되었다. 동작진도 조선 후기 노량진의 이용수요가 급증하게 되면서 진도 관리체계로 편입되었다. 특히 한강도와 노량도는 각 15척이 배치되어 두 나루가 가장 크고 통행량이 가장 많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한강도, 노량도의 수요를 분산하여 두 나루의 인근에 서빙고진과 동작진을 추가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한강도와 노량도에서 각 5척을 새로 편입된 서빙고진과 동작진에 이동 배치하게 되었다. 동작진은 도성으로 들어가는 주요 통로였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다. 다만 편제상 한강진, 노량진, 양화진, 삼전도, 송파진 등 가장 큰 다섯 진에 별장과 무사를 파견하고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등 5군영이 직접 관할하게 하였다.
[경과]
명군의 위문, 독려를 위하여 선조(宣祖)가 수차례 동작진으로 행행하였다.
1597년 8월 정유재란(선조 30) 당시 일본군이 남원과 전주를 통과하여 한양으로 북상하자 조정에서는 평양성에 머무르던 명(明)의 장군 흠차경리조선군무도찰원우첨도어사(欽差經理朝鮮軍務都察院右僉都御史) 양호(楊鎬)에게 한강 이남에서 일본군의 도성 침입을 저지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9월 12일에 선조는 동작진에 주둔하고 있던 양호를 만나 한양 방어를 약속받았고, 10월 27일에는 충청도 직산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돌아온 명의 장군 마귀(麻貴)를 선조가 동작진에 거둥하여 절을 올리고 위문하기도 했다. 또한 정유재란 당시 동작진에 주둔한 명군이 동작강(銅雀江), 동작동(銅雀洞) 모래사장(沙場)에서 진법 연습을 한 곳이었다. 이후 1600년(선조 33) 까지 선조가 11회 이상 행행(行幸)하여 명군(明軍)을 위무할 정도로 동작진은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중요한 요충지이기도 했다.
[결과]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39년(1606) 5월 26일 “떠돌이 중국 군사를 쇄환할 때에 소란을 피울 염려가 있을 것을 대비하여 제반도, 한강도, 동작, 노량 등에 파수하는 군병을 두었으나, 명군 다섯부대가 모두 서쪽으로 무사히 향했다.”라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명군은 이 무렵까지 동작진 등 한강 변에 잔류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