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3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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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面里制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웅호 |
[정의]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영역을 포함한 조선 시대 고을의 영역을 면과 리로 세분하여 편제했던 행정 제도.
[개설]
지방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실시된 조선의 면리제는 17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자연촌의 성장을 바탕으로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를 실시하면서 실질적인 제도로 정착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왕조는 군현제 시행과 더불어 고려 시대 이래 잔존했던 속현(屬縣)과 임내(任內) 등을 정리하여 국가의 지방 지배력을 촌락까지 확대하기 위해 면리제를 실시하였다.
[관련 기록]
“서울과 지방에서 다섯 호를 하나의 통으로 삼고 통주(統主)를 둔다. 지방은 다섯 통마다 이정(里正)을 두고, 하나의 면(面)마다 권농관(勸農官)을 두되 땅이 넓고 호수가 많으면 더 둔다(京·外 以五戶爲一統 有統主 外則每五統有里正 每一面有勸農官 地廣戶多則量加).” 『경국대전(經國大典)』, 호전(戶典), 호적(戶籍).
[내용]
면리제는 조선 전기에 실시되기 시작하여 조선 후기에 정착하였다. 조선 전기 정부는 지방 통치를 강화하고자 군현제 정비와 더불어 면리제를 실시했지만 실제 면리제 정착을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영역은 조선 시대 경기도 과천현(果川縣)의 상북면(上北面)과 하북면(下北面), 금천현(衿川縣)의 하북면(下北面) 일부에 해당한다.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따르면, 경기도 과천현 상북면과 하북면에는 각각 동작리와 사당리, 흑석리와 노량리가 있었으며, 경기도 금천현 하북면에는 번대방리가 있었다.
[변천]
양란 이후 숙종 때가 되어서야 그동안 진행된 자연촌의 성장을 바탕으로 오가작통 제도를 시행하면서 면리제는 정착 단계에 접어들었다. 조선 전기의 방위면(方位面)이 새롭게 재편되고 리(里)의 규모가 다양해졌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에 면리제 정착으로 수령-면임(面任)-이임(里任)-통수(統首)로 이어지는 국가의 대민 지배력이 한층 강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