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수대 문화주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182
한자 明水臺文化住宅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혜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재지 명수대 문화주택 -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지도보기
성격 주택단지

[정의]

일제 강점기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에 있었던 주택단지.

[명칭 유래]

‘명수대(明水臺)’는 맑은 한강 물이 유유히 흐르는 경치가 좋은 곳이라 하여 일본인 기노시타 사카에[목하영(木下榮)][1887~?]가 붙인 이름이다. 기노시타 사카에는 조선에서 제일 큰 규모의 모범 문화촌 건설을 꿈꾸었고, 한강신사를 세운 시키 신타로[志岐信太郞][1869~?] 등과 함께 명수대주택지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분양한 주택지에는 적색, 흑색, 청색 등 여러 색의 지붕을 얹은 서양식 단독주택이 세워졌는데, 이를 가리켜 ‘명수대 문화주택’이라 불렀다.

‘문화주택’은 1920년대 일본에서 만들어진 용어이다. 서양식 또는 근대식의 새로운 주택, 이상적 주택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문화주택은 조선에 들어와서도 거의 동일한 의미로 통용되었다.

빨간 혹은 파란색의 경사지붕, 흰색 외벽, 테라스나 퍼걸러 등의 서양식 외관에 벽돌이나 철근콘크리트, 모르타르나 타일과 같은 새로운 재료의 이용, 커튼과 서양식 가구, 위생설비 등을 갖춘 최신식 고급 주택을 문화주택이라 하였다. 명수대에 조성된 주택지 가운데 문화주택은 5차에 걸친 분양 중 주로 1차와 2차 분양지에 집중적으로 건축되었다.

[형성 및 변천]

명수대주택지의 개발은 기노시타 사카에의 주도 아래 약 10여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마침 경성에서는 192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초까지 교외 주택지 개발 붐이 일었고, 명수대가 대규모 교외 주택지로 개발된 것도 이러한 유행과 무관하지 않다.

경성 시내에 살던 기노시타 사카에는 1929년 주택지 개발에 착수하여 1930년 일부가 완성되자 당시 경기도 시흥군 북면 흑석리였던 명수대에 자신이 먼저 집을 짓고 이사하였다. 이후 기노시타 사카에는 명수대에 자기 소유의 주택지 23만 평을 포함해 부근 일대 30만 평을 본격적으로 개발해 나갔다.

주택지 개발 과정에서는 도로 정비뿐만 아니라 하이킹 코스를 설치하고, 10만 그루의 벚나무를 심었으며 명수호(明水湖)라는 연못을 조성하는 등 풍치가 좋은 명소를 만들어 유원 주택지의 특성을 살리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한편 분양 과정에서 명수대토지경영사무소는 명수대의 아름다운 경관, 쾌적한 입지, 편리한 교통과 도로의 정비, 전화와 전등 시설의 완비 등을 장점으로 내세웠고, 원래 있던 100호도 안 되는 조선인 마을에 80~90세 노인이 17쌍이나 생존해 있는 ‘건강장수마을[健康長壽鄕]’이라고 홍보하였다.

명수대주택지의 1차 분양은 1932년으로 명수대의 서쪽 구릉지에 해당하는 3만 3천 평이었다. 이어 1934년의 2차 분양 역시 서쪽 구릉지의 4만 5천 평이었는데, 1차와 2차는 노량진에 인접한 높은 지형에서 현재의 중앙대학교병원에 걸친 경사면에 해당하는 넓은 구역이었다.

1935년의 3차 분양은 서쪽 구릉지의 일부와 동쪽 구릉지의 8만 평, 4차 및 5차 분양은 경성부에 편입된 1936년에 추진되었다. 다만, 3차 분양 이후부터는 구획정리가 제대로 되기 전에 명수대주택지로 유입하는 인구가 급증하여, 이때 건축된 가옥은 정원이 딸린 문화주택이 아니라 화장실이 없는 집이 많아서 마을 빈터에 공동화장실을 설치해야 했다.

사실 명수대를 주택지의 왕좌로 홍보하던 명수대토지경영사무소가 1, 2차 초기 분양에서 대상으로 선정한 것은 일본인 중상류층 인사였다. 실제로 이때의 분양신청자 중에는 관공리, 회사원, 은행원, 군인, 교육가, 변호사, 의사, 기자, 화가, 음악가, 비행가, 실업가 등이 있었고, 이들은 문화주택을 건축할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분양이 거듭될수록 일본인의 수요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1930년대 후반부터는 조선인으로 판매 대상이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은로학교를 비롯해 중앙보육학교, 경성상공학교, 양복재봉학교, 경성고등음악학원 등 여러 교육 시설이 명수대 지역으로 적극 유치되기도 했다.

또한 영등포공업지대가 인접하였기 때문에 명수대에는 1930년대 후반부터 조선인 인구가 증가하였다. 그 결과, 1940년대에 명수대 거주자는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현황]

일제 강점기에 건축된 명수대 문화주택은 노후에 따른 재건축과 흑석뉴타운 개발 등으로 인해 현재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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