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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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死六臣公園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웅호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는 조선 전기 충신 사육신을 추모하기 조성한 공원.
[세조의 찬탈과 단종 복위 운동]
1452년 문종(文宗)이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단종(端宗)이 왕위에 올랐다. 당시 왕실에는 수렴청정을 할 대비가 없었으므로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은 고명대신(顧命大臣)인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 등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
세종(世宗)의 적자로는 문종 외에도 7명의 대군이 있었다. 이들은 세종 말엽부터 부왕의 지원 아래 서적 편찬과 무기 제조 등의 명목으로 사실상 국정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조정 신료들과 인적 관계망을 갖게 되었고, 이 점은 문종 사후에 왕실의 구심점이 없는 상태에서 둘째 수양대군과 셋째 안평대군의 세력 경쟁을 불러왔다. 정치적 야심이 컸던 수양대군은 권람(權擥)·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홍윤성(洪允成) 등을 막하로 끌어들이고 홍달손(洪達孫)·양정(楊汀) 등의 무사를 양성하는 등 거사 준비를 진행하였다. 드디어 1453년(단종 2) 10월 10일 밤, 정변을 일으켜 실권자인 김종서를 살해한 후 왕명을 빙자해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황보인·조극관(趙克寬)·이양(李穰) 등 많은 관료들을 철퇴로 살해하였다.
정변을 통해 정적을 숙청한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부사·이조판서·병조판서·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을 겸하면서 정권(政權)과 병권(兵權)을 독차지했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하여 쿠데타에 공을 세운 정인지·권람·한명회·양정 등 43명을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책봉하고 주요 관직에 임명하여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기반을 다져나갔다.
1455년 윤 6월, 마침내 수양대군은 단종의 선양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단종은 실권 없는 상왕이 되어 창덕궁에 머물렀다. 그런데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것과 선양의 형식을 빌었지만 사실상 왕위를 찬탈한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명분(名分)과 절의(節義)를 불변하는 절대 가치로 숭상하는 조선 사회에서 왕위 찬탈은 군신(君臣) 간의 명분을 저버리는 행위였으므로 이를 용납하지 않고 맞서는 것이 절의를 지키는 사대부들이 당연히 취할 행동이었다. 이에 세종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성장했던 집현전 출신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 운동이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1456년(세조 2) 6월, 복위 추진 세력에게 기회가 왔다. 세조(世祖)가 상왕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기로 했는데, 마침 그들의 일원이자, 성삼문(成三問)의 아버지인 성승(成勝)과 유응부(兪應孚)가 별운검(別雲劍)을 맡게 된 것이다. 별운검은 운검이란 칼을 차고 왕 옆을 지키는 임시직이었다. 그들은 잔치가 열릴 때 세조와 측근 세력을 제거하고 상왕을 복위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일이 묘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한명회의 주장에 따라 잔치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세우지 않는다는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추진 세력 사이에선 기밀 누설을 염려해 거사 강행을 주장하는 측과 다음 기회를 노리며 보류하자는 측의 갈등이 잠시 있었지만 일단 보류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거사 계획이 보류되자 불안해진 김질(金礩)은 장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거사 계획을 밀고하였다. 이로써 단종 복위 운동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세조는 직접 나서서 거사 주동자들을 조사하며 심한 고문을 가했다. 신문 과정을 통해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류성원(柳誠源)·유응부·성승·박중림(朴仲林)·김문기(金文起)·윤영손(尹鈴孫)·권자신(權自愼)·박쟁(朴崝)·송석동(宋石同)·이휘(李徽)·박기년(朴耆年)·박대년(朴大年) 등 많은 사람들이 가담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 결과 70여 명이 처형당하하고, 재산도 몰수되었다. 거사 가담자뿐 아니라 그 집안사람들도 처벌을 받았다. 아들은 교형에 처하고, 어머니와 딸, 처와 첩, 할아버지와 손자, 형제, 자매, 아들의 처·첩은 변경의 보잘것 없는 읍[極邊殘邑]의 노비로 삼고, 백부와 숙부, 형제의 자식들은 멀리 떨어진 다 쓰러져가는 읍[遠方殘邑]의 노비가 되게 했다.
이처럼 70여 명이나 죽임을 당했지만 오늘날 단종 복위 운동 하면 사육신만 떠올린다. 이것은 생육신 중 한 명인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 문집 『추강집(秋江集)』에 실린 ‘육신전(六臣傳)’의 영향이 크다. 남효온이 육신전에서 단종 복위 운동의 희생자 중에서 이후 사육신으로 불리게 된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류성원·유응부 여섯 명만 기록했기 때문이다.
[지난했던 사육신 현창 과정]
사육신을 비롯한 단종 복위 운동의 희생자들이 복권되고 더 나아가 현창 대상이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세조 당대에는 한쪽 당사자인 세조가 왕위에 있고 그가 즉위하는 데 공을 세웠던 공신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어 희생자들의 복권을 제기할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이 아니었다. 복권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세조 정권을 부정하는 일이어서 역모로 처형될 것이 불 보듯 분명했기 때문이다.
변화의 첫 단추는 생육신 중 한 명인 남효온이 1478년(성종 9)에 올린 소릉(昭陵) 복위 상소였다. 소릉은 문종의 왕비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호(陵號)이다. 현덕왕후는 세자빈 시절인 1441년에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승하하였다. 지금의 안산시에 묻혔다가 1452년 문종이 승하한 후 합장되어 능호도 ‘현릉(顯陵)’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1456년 현덕왕후의 동생 권자신이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했다가 처형되고 아들 단종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자, 현덕왕후 역시 폐위되어 종묘에서 신주가 쫓겨나고 무덤도 현릉에서 분리되어 무덤자리로 부적합한 강가로 이장되기에 이르렀다. 남효온은 바로 20여 년 간 이런 상태에 놓여 있던 현덕왕후의 복위를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남효온의 주장은 임사홍(任士洪)·정창손 등 훈구파들의 반격으로 묻히고 말았고,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사육신을 복권하거나 표창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조정에서 논의되기도 했지만 현실화되지는 못하였다. 반면 민간에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육신이 충절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고, 한강변 노량진 언덕에 있는 몇 기의 무덤을 ‘사육신묘’라 하여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의로운 뜻을 기리곤 하였다.
사육신이 정식으로 복권된 것은 17세기 말 숙종(肅宗) 때에 이르러서였다. 1691년(숙종 17) 9월, 김포에 있는 원종(元宗)[인조(仁祖)의 아버지]의 장릉(章陵)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사육신묘를 지나게 되자 숙종은 그들의 충절에 감동을 받아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성삼문 등 육신(六臣)의 관작을 복구시키고 그들의 기리는 사당에 ‘민절(愍節)’이라는 편액을 내려주었다. 숙종은 세조가 사육신에 대해 “당대의 난신(亂臣)이나 후세의 충신(忠臣)이다”라는 전교를 내렸다는 것을 내세우며 사육신을 현창한 자신의 조치는 세조의 남긴 뜻을 계승하고 성덕(聖德)을 빛내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200여 년이 세월이 흐르며 굳어져온 인식, ‘사육신은 충신이다’라는 사대부 사이의 공론(公論)과 민간의 평가를, 세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국가 차원에서 수용한 것이다.
사육신 현창 작업은 정조(正祖) 때가 되면 더욱 확대되었다. 1782년(정조 6) 사육신 신도비를 노량진 묘역에 세우게 했다. 비문은 태학사 조관빈(趙觀彬)이 짓고 글자는 당나라 명필 안진경(顏眞卿) 글자에서 집자하였다. 1791년(정조 15) 2월에는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우게 하고, 단종을 위해 충절을 바친 인물들에 대해 실록을 비롯한 관련 기록을 철저히 조사하여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를 편찬하였다. 이를 통해 배식단사(配食壇祠)에 위패를 봉안할 육종영(六宗英)[안평대군·금성대군·화의군·한남군·영풍군·이양 등 6명의 종친], 사의척(四懿戚)[송현수·권자신·정종·권완 등 4명의 외척], 삼상신(三相臣)[황보인·김종서·정분 등 3명의 정승], 육신[성삼문·이개·류성원·박팽년·하위지·유응부], 삼중신(三重臣)[민중·조극관·김문기], 양운검(兩雲劒)[성승·박쟁]을 비롯한 충신 32위(位), 조사(朝士)[조정 관원] 198위, 환관군노(宦官軍奴) 28위, 여인(女人) 6위 등 모두 264위를 선정하였다.
[사육신 묘역의 정비와 공원화]
사육신 공원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로 191 서울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에서 한강대교 방향으로 약 500m 떨어진 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하였다.
서울시는 1978년 사육신의 충절을 현창하고자 10,692㎡[3,240평]이던 묘역을 30,921㎡[9,370평]으로 확장하고, 위패를 모신 의절사(義絶祠)를 건립하는 한편 정문인 불이문(不二門), 입구에 위치한 홍살문, 비각 등도 세웠다. 2010년에는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사육신역사관을 개관하였다.
홍살문으로 된 공원 입구로 들어가 경사진 길을 따라 오르면 의절사 건물이 보인다. 그 경내로 들어서면 왼쪽에 사육신 묘비[신도비], 오른쪽에 육각으로 된 사육신비가 있고 정면에 사당 건물이 있다. 사육신 묘비는 정조 때인 1782년에 세웠고, 사육신비는 1955년 서울시에서 세웠다. 상단에는 시인 김광섭이 짓고 서예가 김충현이 쓴 비문이 있고, 중단과 하단에는 서예가 손재형이 쓴 육신의 이름과 그들의 시가 새겨져 있다. 의절사 내부에는 동쪽부터 김문기·박팽년·유응부·이개·류성원·성삼문·하위지 순서로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의절사 뒤편으로 사육신 무덤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름과 달리 6기가 아닌 7기의 무덤이 있다. 본래부터 있던 박씨지묘(朴氏之墓)·유씨지묘(兪氏之墓)·이씨지묘(李氏之墓)·성씨지묘(成氏之墓) 등 4기의 무덤에 더해 ‘사육신묘 성역화 사업’ 때 하위지와 류성원, 김문기의 허묘를 추가했기 때문이다.
사육신 추모대제는 1961년부터 매년 개최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