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6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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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仁[東區] |
영어공식명칭 | Lee In |
이칭/별칭 | 애산(愛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최용석 |
출생 시기/일시 | 1896년 - 이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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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4년 - 이인 일본 메이지대학교 전문부 법과 야간부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18년 - 이인 일본 메이지대학교 전문부 법과 편입 |
몰년 시기/일시 | 1979년 - 이인 사망 |
활동 시기/일시 | 1963년 - 이인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 |
활동 시기/일시 | 1969년 - 이인 무궁화 국민훈장 수여 |
출생지 | 이인 출생지 -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
묘소 | 이인 묘소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3] |
성격 | 독립운동가|변호사|정치인 |
성별 | 남자 |
대표 경력 | 조선변호사협회 회장|대한민국 초대 법무부 장관|대한민국 제헌의회 의원|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대한민국 제3대 민의원|대한민국 제5대 참의원 |
[정의]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출신 변호사, 독립운동가, 정치인.
[활동 사항]
이인(李仁)[1896~1979]은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출신으로 호는 애산(愛山), 달동의숙과 경북실업보습학교를 졸업하였다. 1914년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법과 야간부에 입학 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법과로 편입했다. 그 후 대학원과정인 니혼대학 고등전공과(高等專攻科)에서 수학하였다. 1922년에 일본변호사시험에 합격하였다. 서울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소하고 처음 변론을 맡은 사건이 의열단사건(義烈團事件)이었다. 몇 명 없던 조선인 변호사 중 허헌(許憲)·김병로(金炳魯) 등과 함께 이 사건을 변론하였다. 수원고농사건의 변호 때에는 법정불온 변론문제로 변호사 정직처분을 받았으며, 언론탄압반대연설회 등으로 인해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조선어학회사건 때에는 투옥되어 4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가 맡았던 큰 사건 중에는 의열단사건·광주학생사건·안창호사건·수양동우회사건, 각종 필화 및 설화사건, 수원고농사건, 6.10만세사건·경성제대학생사건·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 등이 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깊숙이 관여하여 당최고위원격인 총무직을 맡으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엿다. 하지만 곧 미군정청이 임명하는 수석대법관(首席大法官)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당을 떠났다. 미군정하에서 검찰총장직을 수행하면서 헌법과 정부조직법의 법안 초안을 마련하여 제헌국회의 헌법기초위원회에 참고자료로 제출하기도 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법무장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계로 다시 돌아가 민의원, 참의원을 지내고, 민주공화당정권 때에는 야당의 원로정치인으로 야당통합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묘소]
이인의 묘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3] 국립대전현충원 내 애국지사 묘역 제4-566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인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1969년 무궁화 국민훈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