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3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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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烈團 爆彈 搬入事件[東區] |
영어공식명칭 | Eiyeoldan Affair bring Bomb |
이칭/별칭 | 황옥사건,제2차 암살파괴계획,황역 경부 폭탄 사건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망우공원 내 기념비가 있는 이경희가 1923년 일제의 주요인물과 식민지 지배기구를 폭파하기 위해 벌인 사건.
[개설]
의열단이 러시아 공산당으로부터 자금을 공급받아 일제의 주요 인물의 암살과 건물 파괴를 단행하는 방법으로 조선의 독립을 꾀하는 과정에서 일명 ‘황옥 사건’이 발생하였다. 제2차 암살파괴계획이라고도 한다. 황옥사건에 관련된 이경희[1880~1949]는 무태[지금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 출신이다. 본관은 인천이다. 1909년 기호학교에 재학 중 신민회의 청년단체로 만들어진 청년학우회 한성연회, 교남교육회, 대동청년회에서도 활동하였다. 1910년대 재건달성친목회, 1915년 대구권총사건 등에 참여하거나 연루되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인 1921년 조선노동공제회 소비조합 운동을 전개했으며, 1922년 단연동맹회를 결성하였다.
[역사적 배경]
1922년 하반기 의열단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경성전기회사, 주요 간선철도 등의 기관 및 시설물, 총독·정무총감·경무국장 등 총독부 주요 요인에 대한 암살 폭파 거사를 추진하였다.
[경과]
의열단 소속이었던 이경희는 1923년 3월 15일 경성[현 서울특별시] 황옥(黃鈺) 집에서 황옥으로부터 「조선혁명선언서」 1책, 「조선총독부 소속 각 관공리에게」라는 문서 100장을 전달받았다. 이경희는 「조선총독부 소속 각 관공리에게」를 각 도지사와 경찰부에 우송하고, 남은 「조선총독부 소속 각 관공리에게」는 사람의 왕래가 잦은 거리에 뿌려 달려는 황옥의 요청을 흔쾌히 승낙하였다. 「조선총독부 소속 각 관공리에게」는 유석현이 비밀리에 국내로 들여온 방화용 폭탄 5개, 파괴용 폭탄발회뇌관 6개, 시계 6개, 권총 5정과 실탄 155발 등과 함께 가지고 들어온 문건이었다, 또 달성[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신으로 중국 북경에 유학중이던 이현준(李賢俊)은 이오길(李吾吉)·김시현(金始顯)·김태규(金泰圭) 등과 함께 1923년 3월 12일 경성[현 서울특별시]으로 출발했다. 이현준·이오길·유석현(劉錫鉉) 등 3명은 경성의 조황(趙晃) 집에 잠복하여 김시현이 오기를 기다렸다. 김시현이 기차 안에서 경찰관에게 검문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김시현은 다음 날인 1923년 3월 13일에 경성에 도착하였다. 이 과정에서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이현준 등은 일경에 체포되는 탄압을 받았다.
[결과]
의열단의 활동은 경기도경찰부, 평안북도경찰부, 신의주경찰서 등 3곳 경찰 기관의 수사에서 그 규모가 밝혀졌다. 먼저, 1923년 3월 14일 평북경찰서 및 신의주경찰서는 안동경찰서와 협력하여 조선일보 안동지국장 홍종우 외 5명의 관계자를 검거했다. 동시에 파괴용·방화용·암살용 3종류의 폭탄 18개, 「조선혁명선언서」 및 「조선총독부 소속 각 관공리에게」라는 제목의 의열단 문서 6백 부를 압수하였다. 경기도경찰부는 1923년 3월 15일부터 관련자 12명을 검거하고, 경성 시내에서 각종 폭탄 18개, 폭탄장치용 시계 6개, 뇌관 6개, 권총 5정, 「조선혁명선언서」 및 「조선총독부 소속 각 관공리에게」라는 제목의 의열단 문서를 압수하였다. 그 후 경찰기관은 3월 말 무렵 조사를 마치고 관련자들을 검찰에 송치하였다. 이경희는 1923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4년 5월 26일 만기 출옥하였다.
[의의와 평가]
의열단폭탄 반입 사건은 독립전쟁론 노선으로 한국 독립을 꾀한 독립운동으로서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고양에 기여하였다. 이경희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는 ‘애국지사 지오 이경희공적비(愛國志士池吾李慶熙功績碑)’가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에 있는 망우공원에 건립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