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6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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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別章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유물/서화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경남대학로 7[월영동 449]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원규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0년 10월 14일 - 별장첩 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09-1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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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별장첩 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96년 1월 24일 - 별장첩Ⅰ 일본 야마구치 현립 대학으로부터 기증 받아 보관 |
현 소장처 | 경남 대학교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경남대학로 7[월영동 449] |
출토|발견지 | 일본 야마구치 현립 대학 - 山口県山口市 桜畠 3-2-1 |
성격 | 필사본 |
작가 | 송찬 외 22인 |
소유자 | 한마 학원 |
관리자 | 경남 대학교 박물관 |
문화재 지정번호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는 경남 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시첩(詩帖).
[개설]
별장첩(別章帖)Ⅰ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 초대 통감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재임 기간에 수집했던 자료로 일본 야마구치 현립 대학[山口縣立大學] 도서관 데라우치 문고[寺內文庫]에 소장되어 있었다. 경남 대학교는 1996년 98종 136점의 조선 관계 자료를 야마구치 현립 대학으로부터 기증 받아 보관하고 있는데 별장첩Ⅰ은 그 중 1종이다. 경남 대학교 박물관 데라우치 문고에는 ‘별장첩’이라는 이름의 시첩이 두 종이 있다. 따라서 편의를 위해 각각을 별장첩Ⅰ·Ⅱ로 구분하도록 한다. 2010년 10월 14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09-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및 구성]
별장첩Ⅰ은 한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기는 43㎝×29㎝이며, 분량은 48쪽이다. 별장첩Ⅰ에는 송찬(宋贊)[미상], 호주(湖州) 채유후(蔡裕後)[1599~1660], 낙정(樂靜) 조석윤(趙石胤)[1617~1678] 등 모두 23인의 송별시가 실려 있고 상태는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별장첩Ⅰ은 1646년 6월 이기남(李箕男)[1598~1680]이 전라도 무장(戊長)[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현 일원] 현감(縣監)으로 부임할 때 여러 사람들이 지은 송별시를 모은 시첩이다. ‘별장’이란 ‘이별을 내용으로 하는 문장’을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벼슬을 그만 두고 낙향(落鄕)할 때, 또는 지방관에 임명되어 부임(赴任)하거나 외국에 사행(使行)을 가는 사람에게 송별(送別)을 아쉬워하며 시를 써 주었다. 이것을 별장시라 부르고, 별장시들을 모아서 만든 첩을 『별장첩』이라 한다. 이러한 장르의 문학을 ‘별장문학’이라 한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66~1618]의 서자(庶子)였던 이기남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정숙(靜叔)이다. 서자였지만 부친의 사랑을 받아 선조(宣祖)가 이항복에게 “아들 중에 누가 쓸 만한가?”라고 하였을 때 스스럼없이 이기남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 병자호란 때는 인조의 유모가 실종되자 이기남이 적진으로 가서 구출하였고, 모두가 꺼려하였던 적진에 사신으로 다녀와 인조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이런 공로로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나라 군대와의 접촉이 잦았던 관서(關西)와 해서(海西) 지방 10개 읍의 수령을 지냈다. 이후 임금의 측근에 있다가 무장현감으로 좌천하게 되었는데 임금에게 올린 봉사(封事)가 임금의 뜻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별장문학의 특징은 대개 주인공의 업적과 인간적인 면모에 대한 찬양, 건강과 안전을 기원 또는 현재에 대한 입장 등을 언급하고 있다. 때문에 순수 문학적 가치는 떨어진다고 하겠지만, 오히려 당시의 시대 상황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 실린 시들에서도 당시 이기남의 처지를 알 수 있는데, 최지위(崔地緯)가 쓴 시에 “한 번 봉사를 잘못 올렸다가 임금의 뜻 거슬렀으나...”라는 구절은 왜 이기남이 중앙에서 지방직으로 좌천되었는지를 알려준다. 또 시의 내용들에는 ‘노래자(老萊子)’, ‘편양(便養)’ 등의 효성과 관한 말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이기남이 한번 좌천된 이상 다시 중앙으로 올라오기 어려웠기 때문에 지방관으로 내려가 어머니를 모시기 편하다는 말로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별장첩Ⅰ은 당시 이기남의 상황을 다른 사람의 시를 통해 전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고 볼 수 있다. 『별장첩』은 필자가 명확하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